제주도는 대한민국 남단에 있으며, 동경 126도에서 127도, 북위 33도에서 34도 사이에 있는 넓이 1,845.88평방 미터의 타원형의 현무암이 많은 섬이다. 제주 바다의 물빛은 검다. 그래서인지 제주 바다의 밤바람 소리도 해녀들의 숨비소리만큼이나 어둡고 탁한 느낌이 있다고들 말한다. 이것은 여수의 우아하고 신비로운 밤바다와는 영 다른 분위기다. 그곳에는 해녀들의 뜨거운 삶의 숨소리,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는 물마중이 있어 삶은 항상 새로이 시작되고 저문다.

‘물마중’이란, 물질을 마친 해녀들을 물밖 갯바위 사이에서 마중하는 것을 말한다. 해녀들은 평균 3시간에서 5시간 가까이 바다에서 채집한 해물을 망사리에 가득 채워 갯바위를 통해 나온다. 고령의 해녀들이 물속에서 채취한 해산물을 망사리에 담아 물 밖으로 나올라치면 그 무게가 상당하다. 지친 해녀들이 물 밖으로 나와 갯바위에 올라서면 물마중이 기다리고 있다. 해녀들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심지어 자신을 기다리는 물마중을 만나면 갑자기 심장의 피가 끓는다고 한다. 가장 힘든 시간, 그러나 가장 보람 있는 시간에 누군가가 자신을 위하여 물마중을 나와 주니 어찌 좋지 아니할까?

해녀들의 땅에는 오래된 소문이 하나 전해오는데, ‘해녀가 앉은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해녀들의 삶이 모질고 거칠다는 뜻이다. 투박한 세월을 지나 지금의 시절을 사는 동안 물마중은 내일 다시 물질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만만치 않은 우리의 삶에서도 누군가가 물마중 해준다면 얼마다 힘이 날까?

또 하나의 물마중이 있다. 광화문 교보문고 건물의 너른 벽에는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름다운 글귀가 나붙는다. 공식적으로 그것을 "글판"이라고 부른다. 금년으로 26년째, 모두 100회째 새로운 글귀로 시민들의 시선을 붙잡는 글판이다. 금년에는 노래와 춤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BTS의 노랫말, "춤 만큼은 마음 가는 대로, 허락은 필요없어"가 설치되었다. 2년째,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살아내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일종의 물마중이다.

모두가 경험했듯이 거의 잃어버린 두 해는 우리의 삶의 리듬과 성취욕을 앗아갔고, 해녀들의 물숨에 가까운 ‘절망이라는 욕망’, 그 역설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전염병의 무서움을 알면서도 삶을 이어가야 하는 많은 사람이 그래도 살겠다고 그곳에 뛰어들었다. 물숨’이란, 물속에서 숨을 쉰다는 뜻으로, 물속에서 숨을 쉬다가 죽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무르고 싶은 나머지 욕심에 숨을 참다가 많은 물을 먹게 된다. 그래서 물숨은 또 다름 물숨을 부른다. 욕망이 붙드는 물속에서 아무도 도움을 받지 못할 때 그만 또 다른 삶을 맞이하는 것이다. 죽음이다.

다큐멘터리 <물숨>의 작가 고희영은 ‘물숨’을 가리켜, "욕망"이라고 말했다. 조금 더 무엇을 얻을까 하여 결정된 시간을 넘겨 물속에서 욕심을 부리다가 숨을 넘기고 만다. 그래서 물숨은 욕망이자 죽음이 된다. 수많은 사람이 삶의 자리에서 물숨이라는 욕망에 붙들려 하염없는 인생의 심연을 경험하고 있다. 이때 누군가가 물마중 했더라면, 누군가가 거친 인생의 갯바위에서 기다려 주었더라면 물숨을 마시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텐데 말이다.

또 하나의 물마중은 성서에도 있다. 예수는 고단한 인생의 길목에서 지치고 서러운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인생들을 초청했다. 그의 가르침과 따뜻한 동행을 힘입었던 많은 사람이 1세기 뜨거운 팔레스타인의 땅에서 거뜬히 물숨을 이겨내고 살아냈다. 지금 여기에서 누군가가 물마중이 되어 준다면 그는 물숨의 욕망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저기 우뚝 서 있는 물마중을 향하여 인생의 갯바위 사이를 무거운 망사리를 끌어안고 뜨거운 심장으로 걷는 우리는 모두 해녀다. 그렇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에게 물마중이 필요하다. 서로를 기다려 줄 물마중. 이제 춤이 아닌, 마음 가는 대로 물마중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허락은 필요 없지 않겠나?

차종관 세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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