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
2021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 5명이 ‘외눈박이 대통령’, ‘절름발이 정책’, ‘정신분열적 정부’, ‘집단적 조현병’, ‘꿀 먹은 벙어리’ 등의 표현을 사용한 전·현직 국회의원 6명에게 100만 원씩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년 후 서울남부지법 민사13부는 이 같은 발언이 장애인 혐오 표현이 맞고, 장애인들이 상당한 상처와 고통,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란 점은 인정했지만,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봤다. 명예훼손과 모욕은 피해자가 특정돼야 하는데 장애인이나 원고를 향한 발언이 아니었고, 장애인을 비하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례 2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등 전문위원회(전문위)는 2022년 3월 24일 성폭력처벌법 등에 쓰인 ‘성적수치심’ 표현을 삭제하고 성 중립적 용어인 ‘사람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하는’ 문구로 대체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성적수치심이란 표현은 "왜곡된 피해자다움이 강요되거나 피해자의 주관적 감정이 범죄 성립 여부에 영향을 미친다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전문위는 성희롱이라는 표현도 "성범죄를 희화화하고 범죄성을 희석할 우려가 높아 부적절하다"며 ‘성적 괴롭힘’으로 바꿔야 한다고 재차 권고했다.

#사례 3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2022년 4월 말 공공기관의 공문서, 방송, 인터넷 등에서 ‘~린이’라는 아동 비하 표현이 사용되지 않도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에게 적극적인 홍보와 교육, 점검 등 적절한 방안을 마련하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인권위는 "아동은 권리의 주체이자 특별한 보호와 존중을 받아야 하는 독립적인 인격체"라며 "여러 분야에서 ‘~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아동을 미숙하고 불완전하다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세가지 사례는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이하 PC)’이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PC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 사용이나 활동에 저항해 그걸 바로 잡으려는 운동 또는 그 철학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사례들은 국가기관이 개입해 판결이나 권고를 내려준 경우이지만, 온라인에선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감시와 개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PC는 우리의 언어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제법 오랜 세월 PC의 적극적 지지자였다. 특히 ‘지방’ 관련 언어의 감시자 역할을 자청하면서 책을 통해 내 생각을 밝히곤 했다. 예컨대, 지방에서조차 "지방방송 꺼"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걸 개탄하면서 그런 몹쓸 말을 쓰면 안된다고 역설했고, ‘지잡대’ 같은 표현을 쓰는 사람들을 ‘학벌에 목숨 거는 지지리 못난 인간’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물론 지방 폄하가 너무 심한데다 특정인을 겨냥해 하는 말이 아니었기에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그렇게 거칠게 말했다는 걸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사실 나는 PC의 생명은 겸손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흔히 하는 말로 ‘지적질’을 받고 기분이 상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PC에 관한 의견을 표명할 때엔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상대방의 기분을 최대한 배려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특정인을 겨냥해 속된 말로 잘난 척 하면서 싸가지 없게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4년 전 캐나다에서 유명 인사 4명이 참가한 가운데 벌어진 PC 찬반 논쟁을 기록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란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프라이가 밝힌 PC 반대 이유를 들어보자. 프라이는 좌파이자 동성애자이므로 PC를 지지하는 게 당연할 것 같은데, 왜 반대하는 걸까? 그게 바로 싸가지 문제 때문이다. 프라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궁극적으로 PC에 반대하는 이유는 제가 일생 동안 혐오하고 반대해왔던 것들이 PC에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 조의 개입, 경건한 체하는 태도, 독선, 이단 사냥, 비난, 수치심 주기, 증거 없이 하는 확언, 공격, 마녀사냥식 심문, 검열 등이 PC에 결합되어 있어요."

한국에서도 왕성하게 제기되고 있는, PC 반대 이유는 대부분 바로 그런 싸가지의 문제다. 여행감독 고재열은 ‘젊은 꼰대들에게’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PC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을 이렇게 토로한다. "자신의 마이너 감수성을 과시하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모습을 볼 때다. PC논쟁은 일종의 ‘태도 게임’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약자인 이들에게 이런 민감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그렇지 못한가’ 하며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낸다."

부탁한다. 아니 읍소하련다. 제발 그러지 말자. PC를 남들에게 으스대는 ‘완장’의 용도로 쓰지 말자. 그건 PC를 죽이는 일이다. PC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PC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매우 높아졌다. 2016년 대선에서 ‘막말의 달인’이었던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를 한 데엔 그의 노골적인 반(反)PC 운동이 적잖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2018년 예일대 조사에선 심층 인터뷰를 한 3천 명 중에서 80%가 PC에 대해 부정적인 답변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소개한, 프라이가 밝힌 이유 때문이다. 프라이는 또 하나의 반대 이유를 제시했다. 그는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커다란 실패는 효과적인 것보다 올바른 것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PC가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얼마나 옳은지에만 집착합니다"라고 말한다. 아닌게 아니라 "옳기 때문에 효과 따위엔 신경쓰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자세도 PC에 대한 반감을 키우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한국에서도 이미 수년전부터 PC 지지자들을 비하해 부르는 ‘PC충’이란 말이 인기를 누리는 인터넷 유행어의 자리에 올랐듯이, PC에 대한 반감의 규모와 강도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겸손하지 않은 PC는 PC를 죽이고야 말 것이다. 나는 PC의 지지자로서 PC의 몰락을 원치 않기에 앞으로 겸손하지 못한 PC를 열심히 비판하련다. 그게 바로 PC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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