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 유일 보물 반야심경약소 모셔진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자재암 전경 사진= 동두천시
자재암 전경 사진= 동두천시

지하철 1호선 종착역에 위치한 ‘소요산(逍遙山)’은 동두천시와 포천시 신북면 경계에 있으며, 예로부터 ‘경기의 소금강’이라 하여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과 폭포, 가을에는 오색 단풍으로 경관이 매우 빼어난 휴양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하백운대(440m), 중백운대(510mm), 상백운대(559m)를 비롯하여 나한대(571m), 의상대(587m), 공주봉(526m) 등 여섯 개 봉우리가 말발굽 모양의 능선과 산 봉우리가 기암괴석으로 절묘하게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 삼봉암동에 위치한 ‘자재암(自在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대동여지도 - 소요산 사진= 국토정보플랫폼
대동여지도 - 소요산 사진= 국토정보플랫폼

654년(신라 무열왕 1년)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년)가 창건하여 ‘자재암(自在庵)’이라고 하였다. 이후 974년(고려 광종 25년) 각규대사(覺圭大師)가 태조 왕건의 명으로 중건하여 ‘소요사(逍遙寺)’로 바꾸고 중대암(中臺庵)·소운암(小雲庵)·소요암(逍遙岩)·영원사(靈源寺) 등이 존재하다가 1153년(고려 의종 7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각령선사(覺玲禪師)가 대웅전과 요사채만을 복구하여 명맥만 이어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구체적인 연혁이 전해지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기 양주도호부 소요사(逍遙寺)조에 "태조의 원당으로 하고 밭 150결을 하사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범우고(梵宇攷)’(전국 8도에 흩어져 있는 절의 존폐·소재·연혁 등을 정리하여 1799년에 간행한 사적기)에는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시에 ‘소요사(逍遙寺)’가 언급되고 있으나 폐허가 되었다고 했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자재암은 태조의 원당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아오다가 어느 시기엔가 폐허가 되다시피 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1872년(조선 고종 9년) 원공선사(元空禪師)와 제암화상(濟庵和尙)이 퇴락한 절 44칸을 모두 중창하여 ‘영원사(靈源寺)’라고 하였다. 이때 영산전(靈山殿)·만월보전(滿月寶殿)·독성각(獨聖閣)·산신각(山神閣)·별원(別院) 등의 건물이 있었다.

1907년(조선 순종 원년) 이곳은 정미의병의 활동 근거지였던 탓에 일본군의 공격으로 만월보전(滿月寶殿)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1909년 제암화상(濟庵和尙)과 그의 제자 성파(性波) 스님이 다시 중창하여 원래 이름인 ‘자재암(自在庵)’이라고 하였다. 이때 전각(殿閣)뿐 아니라 약사여래상과 지장보살상·관음보살상 등의 불상과 함께 이 절의 유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원효(元曉)·의상(義湘)·윤필(尹弼) 등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봉안하였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때 또다시 소실되었고, 1961년 진정(眞精) 스님이 대웅전, 1968년 성각(性覺) 스님이 요사채를, 1977년 법조(法照) 스님이 삼성각(三聖閣), 1982년 일주문을 각각 지었다.

 

자재암 전경 사진= 동두천시
자재암 전경 사진= 동두천시

◇자재암의 유래 및 전설
자재암에는 여러 전설적인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과연 자재암은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 ‘조선지지(朝鮮地誌)’에는 원효대사가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세속의 인연을 맺은 ‘요석궁(瑤石宮)의 옛터’가 있다는 기록과 나중에 원효가 자재암 부근의 하백운대 부근에서 설총(薛聰)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또한 원효대사가 이곳에 초막을 짓고 수행에 정진하고 있을 때 관세음보살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유혹을 하였다. 원효대사는 설법으로 유혹을 물리친 이내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이었음을 깨닫고 더욱 수행에 정진하는 한편,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무애자재인(無碍自在人)의 수행을 쌓았다는 의미로 ‘자재암(自在庵)’이라고 전해진다.

 

요석공주별궁지(왼쪽)와 원효대
요석공주별궁지(왼쪽)와 원효대

한편, 절 근처에는 조선 태조가 즐겨 찾았던 백운대(白雲臺)와 폐정(廢井)이 있고, 백운대 밑에 있는 폭포는 원효가 노닐던 곳이라고 하여 원효대(元曉臺)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는 ‘소요사(逍遙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제암화상와 원공스님이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우연히 만나서 절을 중창했다는 영험담도 전해지고 있는데 제암 스님은 본래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의 스님으로 보개산에서 기도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소요산 아래 동두천의 어느 주막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고는 아침에 일어나 주인에게 근처에 절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인은 자재암이라는 절이 있다고 하였다. 주인의 대답을 듣자마자 스님은 그 길로 절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막상 절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고 다만 폭포소리만 요란할 뿐이었다. 스님은 의아해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한 스님이 오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달려가 인사를 나누며 물어보니까 그 스님이 대답하기를 "나는 이 절의 주지인데 방금 마을에서 탁발을 하고 오는 길이오"하며 이어 말하기를 "긴 밤 꿈에 두 사미가 나타나 나에게 말하기를 ‘내일 아침에 귀한 손님이 오실 터이니 주지께서는 그분을 꼭 환대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소원입니다’ 합디다. 그래서 얼른 이렇게 오는 길이지요"하였다.

그리고 다시 말하기를 "이 산은 경치가 좋지만 절은 작고 퇴락하여 곧 무너질 지경입니다. 원컨대 스님께서 대시주가 되어 나와 함께 이 절을 중건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스님이 원공스님이다. 이에 제암 스님은 기뻐하며 시주가 되어 불사를 하였고, 3년이 되는 해 3월에 모든 불사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새로 법회를 열고 절 이름을 영원사로 고쳤다고 한다.

◇동두천의 유일한 보물,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金剛般若波羅蜜多心經略疎)’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金剛般若波羅蜜多心經略疎)’는 당나라 현장이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金剛般若波羅蜜多心經略疎)’에 송나라 중희(仲希)의 ‘현정기(顯正記)’를 붙여 편찬한 주석서이며, ‘반야심경소현정기’ 또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의 여러 종파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보편적인 경전이다. 크기는 세로 31cm, 가로 19.1cm로 목판에 새긴 후 닥종이에 찍어냈고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듯 표지가 없다.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金剛般若波羅蜜多心經略疎) 사진=동두천시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金剛般若波羅蜜多心經略疎) 사진=동두천시

책머리에는 ‘반야심경소현정기병서(般若心經疏顯正記幷序)’라는 서제(序題)가 기재되어 있고, 다음 행에 ‘진운사문석 중희 술(縉雲沙門釋 仲希 述)’이란 저자표시가 보인다. 그리고 5행에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라는 서명이 보이고 있으며, 이하 약소의 내용이 장 14까지 수록되어 있다. 장 15부터는 심경의 내용이 주석과 함께 수록되어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 또한 금강경의 전문(箋文: 글의 뜻을 해명하거나 자기의 의견 등을 적어서 그 책에 붙이는 작은 쪽지)인 ‘금강경심경전(金剛經心經箋)’이 붙어 있다. 전문에 의하면 금강경은 1464년(조선 세조 10년)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인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한 기록이 있다.

책 끝에는 한계희(韓繼禧, 1423~1482)의 발문으로 보아 왕명을 받아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과 함께 당시 교종판사(敎宗判事)인 해초(海超) 등 고승의 도움을 받으며 교정하고 국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발문의 말미 일부는 잘려있다.

특히 이 책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보관 중인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언해)(金剛般若波羅蜜多心經略疎)(諺解)’(보물)와 같은 책이나 책머리에 금강경의 전문이 붙어 있는 것이 다르며, 보존 상태도 보다 양호하고 ‘교정인(校正印, 교정을 하였다는 뜻)’이라 쓰여진 도장이 찍혀 있다.

김병철 동두천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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