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의 비밀.
숨기고 싶다. 숨겨야 한다. 너와 내가 나눈 대화를. 어쩌면 부끄러울 수도, 어쩌면 진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알아서는 안 된다. 우리 둘의 관계를. 소중했을까? 남겨두고 싶었을까? 서랍 안이었을까? 귀한 상자 속, 아니면 자물쇠를 걸어놓은 금고였을지도. 두 남자 사이에 오고간 12통의 편지. 영원히 감추고 싶었던 흔적. 비밀에 부쳤건만 끝내 드러나 버렸다. 임금과 신하사이 오고 갈수 없는 은밀한 편지. 429년 동안 숨겨온 두 남자의 비밀을 슬며시 들춰본다.
◇비밀편지의 배경
임진왜란(1592~1599년)이 한창이던 1593년 7월 24일, 의주로 피난 온 선조는 당시 평안도·함경도관찰사 송언신에게 한 통의 비밀편지를 보낸다.
편지의 내용은 전쟁 통에 잃어버린 두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을 찾아 보호해 달라는 선조의 부탁.
첫 편지 이후 두 사람은 1599년까지 총 12통의 편지와 함께 선물을 주고받으며 서로 공식석상에서 내놓기는 힘든 부탁(?)과 끈끈한 애정을 이어갔다.
해당 편지의 내용이 대중에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사람이 비밀편지로 뜻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여산송씨(礪山宋氏) 문중에서 보존해온 편지를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하면서다.
편지를 기증한 여산송씨는 과거부터 가문의 근거지를 현재 성남시 일원에 두고 있었으며 현재는 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하대원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여산송씨는 편지의 주인공 ‘송언신’의 증조부인 송수가 광주군 중부면 복정리 음촌(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응달말) 일원에 자리잡은 뒤 송언신이 선조 임금 시기 함경도관찰사, 이조판서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면서 지역기반을 넓혀갔다.
여산송씨뿐 아니라 조선후기 많은 사대부 가문은 경기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했고 많은 문중이 현재까지 경기지역에 남아있다.
경기도박물관은 경기지역 대표 종합박물관으로서 각 문중으로부터 당대 서찰을 비롯한 많은 유물을 기증받았다.
2022년 3월 기준 경기도박물관은 3만6천94여점의 등록 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개인, 문중, 단체 등 360여개 기관으로부터 400여회에 걸쳐 기증 받은 자료는 1만9천816여점에 이른다.
이번 선조와 송언신 간 비밀편지는 당시 시대상, 왕과 신하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롭고 귀중한 자료이며 또 임진왜란이라는 전란기의 특수한 상황도 대변한다.
중부일보와 경기도박물관은 선조-송언신 비밀편지 12통을 시작으로 향후 수백년의 비밀을 간직한 사대부들의 편지들을 하나하나 소개한다.
◇비밀의 시작
선조임금이 첫 번째 편지 보낸 시기는 임진왜란 발발 1년여가 지난 시기다. 당시 전황은 수세적 상황에서 행주대첩(1593년 3월14일), 한양수복(1593년 4월 20일), 환도(1593년 10월 3일) 등 일본군 축출을 위한 공세적 상황으로 전환된 시기 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시기이지만 편지 내용처럼 왕자와 공주를 챙길 수 없을 정도로 긴박했던 전쟁초기, 혼란스러운 조선조정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또 전쟁으로 한양이 불타고 조정이 피난길에 오르면서 행정체계가 붕괴돼 생산해야할 문서들이 생산되지 못했고, 보관한 문서들은 소실됐다.
이 때문에 편지에서 잃어버린 공주 2명과 왕자 1명이 누구인지 실제로 찾았는지 조차 공식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선조의 자녀 중 의창군과 정혜옹주가 어가 행렬과 떨어져 피난했다가 합류한 기록은 있지만 이 2명이 편지에 언급된 왕자와 공주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편지에 언급된 공주 2명과 왕자 1명의 행방은 확인할 수 없으나 전쟁으로 사망한 왕자와 공주가 없었던 점, 이후 송언신과 선조의 남다른 관계를 미루어 송언신이 이들 중 누군가는 찾아 보호했거나 무사히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진 2번째 편지에서는 전쟁으로 궁핍해진 선조의 상황을 보여준다.
편지에서 언급된 ‘방물’은 임금에게 바치는 특산품, 진상품으로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민심의 이반을 우려해 폐지한 것이다.
선조는 방물이 없어져 전쟁 이전처럼 풍족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보내주신 물건도 아울러 받고 보니 실로 감명이 깊도다. 평소에 내 거처에 두고 벗 삼아 변성을 지키는 사람들을 생각하겠노라.’라는 말로 송언신이 보낸 물건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또 여러 사족을 붙이기는 했지만 선조임금은 송언신에게 ‘불평과 번거로움을 헤아리지 않은 것이니 감히 무릅쓰고 구한다면 많이 보내시라. 기쁨을 이기지 못하나 보답할 것이 없도다. ’라며 더 많은 물건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선조와 송언신간 편지에서는 선조가 송언신에게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거나, 송언신이 무엇인가를 보내고 그 답례로 선조가 다른 선물을 하사는 내용이 수차례 등장하며 둘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송언신이 선조에게 보낸 물건은 무엇인지는 송언신이 선조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지 않아 확인되지 않는다. 또 공식적으로 보낸 물건들도 아닐 뿐더러, 공식기록 역시 제대로 생산되지 못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은 역대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가장 부실한 실록으로 꼽히고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선조실록을 편찬할 당시 실록을 만들 사료가 부족해 사대부 집안의 서찰, 문집 등을 제출해 달라는 요청할 정도였다.
안형철기자
첫 번째 편지
함경도관찰사 송언신에게 (실록에는 평안도관찰사로 기록)
북도(北道)의 일은 전적으로 경에게 맡기니 경은 마땅히 마음을 다하고 또 나의 딸 2명과 아들 1명이 어릴 때 난리로 헤어져 민간인과 함께 북도로 갔다고 하므로 그들의 생사가 막연하여 밤낮으로 오랜 병이니 다행히 찾아서 보호하고 돌봐준다면 경의 그 은덕에 장차 보답이 없겠는가.
7월 24일 의주에서(1593년)
두 번째 편지
서찰이 와서 환절기에 안부를 알게 돼 기쁘도다. 보내주신 물건도 아울러 받고 보니 실로 감명이 깊도다. 평소에 내 거처에 두고 벗 삼아 변성을 지키는 사람들을 생각하겠노라. 변란 이후로부터 이미 방물을 폐하였으니 이는 내가 까닭 없이 많이 얻는 불평과 번거로움을 헤아리지 않은 것이니 감히 무릅쓰고 구한다면 많이 보내시라. 기쁨을 이기지 못하나 보답할 것이 없도다. 무더위가 심한 때를 당하여 위국자애(나라와 본인 모두 챙기라)하시라.
정유(1597)년 임종(6월) 순일(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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