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된 이 유물은 조선시대 선조가 송언신(1542∼1612)에게 남모르게 보낸 친필 편지이다. 유물의 명칭은 ‘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첩(宣祖御書賜宋言愼密札帖)’이며 크기는 가로 24.2㎝, 세로 36.6㎝이다. 보물 제941호로 밀찰첩과 함께 송언신 초상 등이 일괄로 지정되어 있다.
밀찰첩은 1593~1599년 6년간에 걸쳐 선조가 송언신에게 내린 어찰 12건을 수록하고 있다. 송언신과 그 후손들은 임금의 친필 편지를 보존하여 국가의 보물로 지정받게 했다.
송언신은 선조 임금이 총애하는 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송언신은 평안도관찰사였다. 임금의 급박한 피난 행차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군병을 도열시켜 어가를 호위했고, 조선왕실의 어보(御寶) 60여개를 임금으로부터 인수받아 보존하고 있다가 전쟁이 끝난 후 빠짐없이 반납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송언신에 대한 선조의 신뢰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이 바로 이 비밀편지이다. 첫번째 임금의 편지는 1593년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받은 편지이고 나머지는 함경도관찰사 재직시에 받은 편지들이다.
밀찰첩은 공식적인 문서가 아닌 만큼 왕과 신하사이의 진솔한 감정, 주고받은 선물목록과 건강을 위해 내린 약재와 처방법 등 인간적인 내용들이 편지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선조는 전란으로 국가의 어려움을 당함은 국왕인 자신의 책임이라 자책하며 고뇌에 찬 심경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 유물은 선조의 어제어필로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전쟁의 상황, 함경도의 방어 등 국방관련 사실, 임금과 신하간의 편지 왕래와 선물교환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조준호 경기도박물관 수석학예사
*‘선조실록’에는 1593년 7월 송언신은 평안도관찰사였고,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는 시기는 1596년이후로 기록되어 있다. 간찰첩의 연대와 차이가 난다. ‘선조실록’이 전쟁이후 편찬되었기에 많은 문서들이 불타버렸고, 이 때문에 기록의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학계에서 받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송언신의 관력(官歷)은 간찰첩의 내용을 우선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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