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한 이후 초기의 전쟁 상황은 매우 불리했다. 파죽지세로 일본군은 북상했고,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개전 초 조선의 여러 지역은 일본군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함경도지역은 1592년 6월말부터 1593년 2월말까지 약 8개월간 일본군의 점령을 받았다. 임진왜란 개전초기 선조 임금은 조정의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광해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그리고 1592년 4월 29일 왕자인 임해군을 함경도로, 순화군을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군(勤王軍)을 모집하고 백성들을 위로하도록 했다.
선조는 일본군의 북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길에 올랐다. 강원도로 갈 예정이었던 순화군은 일본군이 강원도로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방향을 북쪽으로 바꾸어 5월 5일 함경도 안변(安邊)에서 임해군과 합류하였다. 이후에도 그들은 일본군의 침입을 피해 끊임없이 북쪽으로 피난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이 황해도를 거쳐 6월 17일 함경도 안변으로 진격한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일본군은 두 왕자가 북쪽으로 피신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결국 두 왕자는 함경도 회령부(會寧府)에서 조선인의 반란세력에게 붙잡혀 일본군에 넘겨졌다. 또 함경도에 침입한 일본군은 함경도관찰사 유영립(柳永立)을 체포하고 병사 이혼(李渾)은 반란을 일으킨 조선의 백성에게 피살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함경도를 장악한 일본군의 형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함경도 백성에게 혹독했던 일본군의 군량미 수탈로 인한 인심 이반과 1593년 1월 명나라 군대의 평양성 탈환 등 전쟁의 상황변화로 인해 그들은 함경도 점령을 포기하게 된다.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은 함경도에서 철수하여 1593년 2월 한성으로 퇴각하기에 이른다.
조준호 경기도박물관 수석학예사
관련기사
- [선조의 비밀편지 ②] 건강전도사 선조… 건강에 대한 관심과 송언신에 대한 신임 구구절절 드러나 이번 3통의 편지에서는 선조의 건강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지식을 엿볼 수 있으며 자신이 복용하던 약을 송언신에게 선물로 보내며 그에 대한 신임과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4번째 편지 번역본서장은 살폈도다 지병인 풍습증에는 의원의 말인즉 표범 가죽으로 치료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얻을 수가 없도다. 보낸신 것을 또 받고 보니 고맙고 기쁘기 그지 없도다. 여기 감사하는 뜻으로 보내는 활과 화살*은 보답이 아니다. 장궁 3전과 편전 2부와 장전 2부와 후전 30지를 노내노라.정유(1597) 맹동 념6일(10월 26일)9번째 편지 번역본걱정
- [선조의 비밀편지 ①] 429년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편지… '선조·송언신'의 인간적 속사정 #두 남자의 비밀.숨기고 싶다. 숨겨야 한다. 너와 내가 나눈 대화를. 어쩌면 부끄러울 수도, 어쩌면 진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알아서는 안 된다. 우리 둘의 관계를. 소중했을까? 남겨두고 싶었을까? 서랍 안이었을까? 귀한 상자 속, 아니면 자물쇠를 걸어놓은 금고였을지도. 두 남자 사이에 오고간 12통의 편지. 영원히 감추고 싶었던 흔적. 비밀에 부쳤건만 끝내 드러나 버렸다. 임금과 신하사이 오고 갈수 없는 은밀한 편지. 429년 동안 숨겨온 두 남자의 비밀을 슬며시 들춰본다.◇비밀편지의 배경임진왜란(1592~1599년)이 한창
- [조준호 학예사의 비밀편지 톺아보기] ①선조가 송언신에게 보낸 비밀편지 ‘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첩’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된 이 유물은 조선시대 선조가 송언신(1542∼1612)에게 남모르게 보낸 친필 편지이다. 유물의 명칭은 ‘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첩(宣祖御書賜宋言愼密札帖)’이며 크기는 가로 24.2㎝, 세로 36.6㎝이다. 보물 제941호로 밀찰첩과 함께 송언신 초상 등이 일괄로 지정되어 있다.밀찰첩은 1593~1599년 6년간에 걸쳐 선조가 송언신에게 내린 어찰 12건을 수록하고 있다. 송언신과 그 후손들은 임금의 친필 편지를 보존하여 국가의 보물로 지정받게 했다.송언신은 선조 임금이 총애하는 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
- [선조의 비밀편지 ③] 임진왜란 시기, 경계 늦출 수 없는 북방지역 일본과의 전쟁으로 함경도 등 북방지역은 후방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조선의 주된 군사적 초점은 전통적으로 북방이었다.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주력군을 이끌고 탄금대 전투에 나선 신립 장군은 임진왜란 이전 여진족 니탕개의 난(1583)을 평정하고 조선 제일의 장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이번 두 편의 편지에서는 임진왜란시기 북방지역 특수성과 여전히 국경이었던 북방의 상황을 보여준다.6번째 편지서장을 살피니 반갑도다. 보내신 좋은 말씀은 참으로 정치의 격언이라 비망록(備忘錄)에 적어 두지 않겠는가! 보내주신 것을 자주 받고 보니 감사할
- [조준호 학예사의 비밀편지 톺아보기] ③ 송언신의 관직 활동과 생애 송언신은 여산송씨로 그의 선대는 일찍이 서울 경기지역에서 활동했던 관료 가문 출신이다. 일찍이 유희춘(柳希春)·노수신(盧守愼)·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송언신은 1577년(선조 10)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예문관과 사간원 등에서 언관으로 활동하며 서인(西人)을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시 평안도관찰사로 전란을 맞이한다. 하지만 1592년 6월 평양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당하자 송언신은 평안도관찰사에서 물러났고, 방비를 못한 책임을 물어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선조 임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