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입구에서 바라본 극락보전
쌍계사 입구에서 바라본 극락보전

지난 주말 안산시 대부도에 있는 쌍계사(雙溪寺)에 다녀왔다. 쌍계사가 어떤 절이냐고 묻는다면 사람의 들고 남에 관심이 없는, 욕심 없는 절이라고 답할 것 같다. 도착하자마자 동행과 함께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긴 시간 동안 현세와 내세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나눴다. 몇 채의 전각과 요사채로 이루어진 소박한 공간은 어쩌다 한 번 들른 사람에게도 넉넉한 품을 내어준다. 마음의 여유만 준비되어있다면 공간의 여유와 멋스러움을 만나게 된다. 이 사찰이 있는 섬 대부도도 그렇다.
 

선방에서 바라본 극락보전과 요사채
선방에서 바라본 극락보전과 요사채

대부도에는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이 참으로 없다. 언뜻 보기에 척박해 보이는 장소에 농사지을 땅이 있고 갯벌이 있다. 섬사람들이 시간을 쪼개어 농사일과 물일을 부지런히 하면 먹거리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생활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섬을 낙지처럼 생겼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연꽃같다 말해 왔다. 섬의 북쪽에 위치한 작은 절은 양쪽 개울에서 물이 흘러 쌍계사라 불려왔다. 물줄기는 절 앞의 논마지기를 적시고 논 앞으로는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오랜 시간 섬에 살아온 사람들에게 욕심 없는 갯벌처럼 곁에 있었던 경관이 쌍계사이다. 1994년 시화방조제 공사가 완성되며 섬이 육지와 연결되자 이 절은 또 다른 전기를 맞게 되었고 지금은 안산을 대표하는 전통사찰이 되었다.
 

취헐당대사 부도탑
취헐당대사 부도탑

쌍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사찰이다. 법당 뒤편 언덕에 ‘취헐대사탑’이 남아 있어 조선 후기 17세기말 취헐(翠歇)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한편 1576년을 나타내는 명문기와가 발견되어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원래 이름은 정수암(淨水庵)이었는데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였고 1750년에 절 이름을 쌍계사(雙溪寺)로 개칭하였다. 1841년에 화재로 사찰에 훼손되자 1869년에 중창하였다. 이후에도 불화를 조성한 기록이 전해져 절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쌍계사의 가람배치는 상단법당으로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하고 그 전면에 중단법당인 명부전이, 극락보전의 측후면에 하단법당인 삼성각과 용왕각이 있다.

본당인 극락보전의 본존불은 서방극락정토를 관장하면서 중생들에게 무한한 광명과 생명을 베푼다는 아미타불이다. 쌍계사의 극락보전은 동향으로 법당 가운데 문이 나 있고 부처님도 동쪽을 바라보고 앉아계신다. 범어로 아미타는 무한을 의미하고 보통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삼존불을 이루는 협시보살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라 불자가 아니더라도 가장 익숙한 이름이다.

극락보전
극락보전

극락보전에는 경기도 지정문화재인 목조여래좌상(조선후기, 유형 181호, 2002년 지정), 아미타회상도(문화재자료 제110호, 2002년 지정), 현왕도(1803, 유형 182호, 2002년 지정)가 있고, 비지정문화재로 신중도(1863)가 모셔져 있다. 정 가운데에 좌대에 정좌한 모습의 목조여래좌상이 있고, 뒤쪽에 후불탱으로 18세기에 제작된 아미타회상도가 섬세하게 펼쳐져 있다.

특히 극락보전의 현왕도와 신중도는 특별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현왕도는 18세기 이후 망자천도 의식이 성행함에 따라 조성되기 시작한 불화이다. 1803년에 조성된 쌍계사 현왕도는 서울, 경기지역에 현존하는 현왕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현왕도 도상의 성립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현왕도의 화기에는 18세기 후반 화성 건립에 화공으로 참여하고 경기도에서 활동한 불화승 유선과 경환이 등장한다.
 

목조여래좌상과 아미타회상도
목조여래좌상과 아미타회상도

신중도는 법당 좌우에 모셔지는 불화의 종류이다. 사찰의 규모에 따라 104위 호법신에서 주신인 위태천신만을 모시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제작시기가 1869년인 쌍계사 신중도는 화풍을 근거로 춘담봉은이 이끄는 화승집단이 제작한 불화로 추정되며 19세기 화승들의 활발한 활동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주신인 위태천을 중심으로 보살과 동자들을 2단 구도로 배치하였다. 화려한 의상에 청색 안료와 금박 등을 사용한 극채색에서 섬세함과 유려함을 느낄 수 있다.

 

신중도 세부
신중도 세부

현왕도와 신중도는 수원 무봉산 만의사 도성암에서 제작되어 봉안되었다가 쌍계사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공고한 ‘쌍계사 귀중품’목록에도 아미타불상, 신중탱, 현왕탱 등의 기록이 있어 일부를 제외하고는 현재까지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93년, 2005년에 조사된 쌍계사 성보대장에도 신중도가 확인된다. 쌍계사에 존재하고 있는 유물은 사람들의 마음을 전하는 성보이기도 했다.

극락보전의 오른쪽으로 용왕각이 있다. 쌍계사 창건설화에 따르면 대부도의 산모퉁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취헐대사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5마리의 용이 승천하고 황금 물기둥이 치솟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난 대사가 꿈에 봤던 자리를 찾아보니 용바위가 있었고, 바위 아래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어 그 자리에 불사를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도 마치 용의 이빨처럼 보이는 용바위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다. 바위 아래로 흐르는 물은 과거에는 절 앞의 뜰까지 흘러 농업용수로도 쓰였다고 한다. 용은 예로부터 물을 관장하는 신으로 알려졌다. 현세의 풍요의 상징인 용과 불법이 어우러진 절의 창건설화는 다양한 이본을 생성하며 지금도 풍성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쌍계사 신중도
쌍계사 신중도

근세 이래 사찰은 부처님의 법의 보존과 수행이라는 본래의 기능과 함께 사람이 겪어야 하는 이별과 슬픔을 믿음과 의례로 극복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쌍계사는 과거부터 내세의 극락정토를 기원하며 현세를 사는 사람들을 평안하게 하는 장소였다. 근래에도 명부전, 삼성각 등이 새롭게 건립되었고, 올해부터는 소나무숲을 활용하여 수목장을 안치하는 장례문화원이 조성되었다. 명부전의 옆으로 난 샛길을 오르면 소나무와 측백나무로 이루어진 1천400기의 추모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는 사실 하나의 물음이다. 앞으로의 우리네 삶이 풍요로워질수록 아마도 사찰에 대한 기대와 역할도 바뀌게 될 것이다. 오늘의 쌍계사는 불교의 전통적 가치를 현대문화와 접목하여 순기능을 하는 미래를 고민하고 있었다.
 

쌍계사 수목장림
쌍계사 수목장림

"생사(生死), 삶과 죽음이란 모를 때는 삶과 죽음이다. 눈을 감고 나면 캄캄하지만 눈을 뜨면 광명이다. 현실을 바로 보고 마음의 눈만 뜨면 지상이 극락이다." 삶과 죽음이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는 성철스님의 말씀을 새겨 본다. 현세와 내세라는 양갈래의 물줄기가 쌍계사에 이르러 하나로 합해지고 있었다.

쌍계사는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비봉IC, 영동고속도로와 서울외곽순환도로는 월곶IC에서 시화방조제 방향으로 진입해서 올 수 있다. 대중교통으로는 인천 주안동, 만수동, 안산까지 지하철을 이용한 후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방법으로도 찾아올 수 있다.

이수빈 안산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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