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덕사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산자락
용덕사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산자락

용인시 이동읍 묵리 일원에는 북서방향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이 하나 있다. 이 하천 주변으로 비교적 높은 산지가 형성되어 계곡을 이루고 있는데, 이 묵리계곡은 용인에서는 여름철 물놀이 장소로 유명세가 있는 편이다. 최근에는 아기자기한 카페들과 캠핑장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더욱 끌고 있다. 이 묵리계곡을 따라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 바로 용덕사천이다. 사찰의 이름이 하천에 쓰인 다른 사례가 더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사찰이 하천 이름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것으로 볼 때, 이 일대에서 용덕사의 사세가 어떠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용덕사는 용인시 이동읍 묵리 성륜산(聖輪山)에 자리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이다. 창건기록이 명확하진 않지만 1792년 쓰인 ‘용인군성륜산굴암용덕암창건기(龍仁郡聖輪山窟巖龍德庵創建記)’에 따르면 신라 문성왕(文聖王) 대에 염거화상(廉居和尙)이 창건하고 도선국사(道詵國師)가 3층석탑과 철인(鐵人) 3구를 조성하면서 중창되었다고 한다. 이후 1914년에 쓰인 ‘불량전답헌납기(佛糧田畓獻納記)’ ‘용덕사 중수기(龍德寺 重修記)’에는 위 기록에 더해 1792년 석담선사(石潭禪師)가 중건한 후 1825년, 1884년에 차례로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의 용덕사는 규모가 그리 큰 사찰은 아니지만 ‘불량전답헌납기’를 보면 용덕사가 자리잡고 있는 이동읍 일대의 전답 대부분이 용덕사 소유라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말기까지 사찰의 세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미미하게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1998년 성효스님에 의해 대대적으로 중창되어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해동지도
해동지도

 

◇성륜산의 또 다른 이름 굴암산

용덕사를 올라가는 길은 꽤 가파르다. 이 오르막길 중간에 ‘성륜산 용덕사’라고 쓰여 있는 일주문을 만나게 되는데, 이 일주문을 통해 이 산의 이름이 성륜산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여러 지도에서 이 성륜산이라는 이름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굴암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왜 산의 이름이 여러 개일까? 1792년 창건기에도 성륜산으로 나와 있으니 성륜산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1872년 지방지도에서도 ‘성륜산(聖崙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1872년 지방지도에서 성륜산 아래 사찰 이름으로 ‘굴암사(窟巖寺)’가 눈에 띈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18세기에 제작된 ‘광여도(廣輿圖)’와 ‘해동지도(海東地圖)’ 등에서는 아예 ‘굴암산(窟巖山)’이란 이름이 보인다. 성륜산이 굴암산이라고 불린 이유는 이 산에 굴암, 즉 용굴이 있었던 까닭인데, 이 굴암이 용덕사 창건 설화로 알려진 용굴설화의 그곳임을 알 수 있다.
 

용덕사 용굴입구
용덕사 용굴입구

◇효녀와 여의주 용덕사 창건설화

용굴설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시대에 효성이 지극한 어느 처녀의 아버지가 위독한 병에 걸렸다. 아버지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성륜산 용굴에 살고 있는 용의 여의주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처녀는 용굴에 살고 있는 용을 찾아가 여의주를 달라고 간청하였다. 용은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처녀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을 받아 목숨과도 같은 여의주를 내주기로 했다. 용이 처녀에게 여의주를 내주려던 찰나 골짜기 저편에서 사냥꾼이 쏜 화살이 용을 맞춰버리는 바람에 용은 쓰러져 죽고 여의주도 녹아버리고 말았다. 이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삼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용의 명복을 빌고 아버지의 병이 완쾌되기를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리다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간절한 정성과 기도 덕분인지 처녀의 아버지는 병이 나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어느 노스님이 성륜산에 불에 탄 절을 다시 지으려고 했는데, 어느 날 대들보 목재가 용굴 앞으로 옮겨져 있는 것을 보고 절을 용굴 앞으로 옮겨 지었으며 처녀의 명복과 용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절의 이름을 용덕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 때문인지 용덕사는 인근 주민들에게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주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지금의 용덕사에서 북서쪽으로 산자락을 하나 넘으면 완만한 경사면에 축대와 건물지 흔적이 남아 있어 설화가 단지 설화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용덕사 석조여래입상과 나한상
용덕사 석조여래입상과 나한상

◇연꽃 들고 있는 미래불 모신 용덕사

일주문을 지나 사찰에 다다르면 가장 먼저 종무소가 보이고 그 뒤로 눈을 돌리면 높이 쌓은 축대 위로 대웅보전, 미륵전, 범종각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미륵전 안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석조여래입상과 그 뒤로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용덕사 인근 용덕저수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당시부터 대좌와 광배는 사라진 상태였다고 한다. 부처님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그리고 우리는 부처님의 각기 다른 이름을 통해 그 부처님이 어떤 부처님인지 알 수 있다. 이 석조여래입상을 미륵전에 모신 이유는 이 부처님을 미륵불로 보기 때문이다. 미륵불이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56억7천만 년이 지난 먼 미래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내려오는 부처님을 말한다. 대체로 미륵불은 손에 꽃가지를 잡거나 꽃봉오리를 들고 있는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용덕사 석조여래입상은 오른손으로 아직 만개하지 않은 연꽃봉오리를 살짝 쥐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이로 인해 미륵불로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기록에 따르면 용덕사에는 크기가 7촌, 폭이 4촌이며 돌로 만들어진 나한상 53구가 모셔져 있다고 하였다. 나한(羅漢)이란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수행자 중에서 깨달음을 얻어 가장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을 일컫는다. 따라서 아직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조각상으로 만들어질 때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용덕사 나한상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다양한 모습에서 간취되는 특징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모습, 밝게 웃는 모습, 화가 나 있는 듯한 모습, 광대뼈가 돌출되거나 움츠리고 있는 모습 등 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온다. 기록에서는 53구가 모셔져 있다고 하는데, 현재는 이보다 약간 많다.
 

용굴로 오르는 돌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보이는 극락보전
용굴로 오르는 돌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보이는 극락보전

◇걷기 좋은 성륜산 보물같이 숨겨진 길

용굴은 대웅전 뒤쪽으로 성륜산 정상에 거의 다다른 곳에 자리잡고 있다. 용굴로 오르기 전 잠시 뒤를 돌아 대웅전 쪽을 바라본다. 대웅전의 팔작지붕과 맞은편 산세가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이 풍경을 보며 용굴설화에 나오는 사냥꾼이 저 산골짜기에서 화살을 쏜 것은 아닐지 잠시 상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대웅전에서 용굴까지 올라가는 길은 반듯한 돌계단이 아니라서 어른이 올라가기에도 만만치가 않다.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게 만들어진 돌계단은 빽빽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오롯이 걷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만들어 준다. 용덕사의 숨겨진 보물같은 길이다.

숲길이 끝나는 곳에서 세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잠시 어디로 갈지 망설이게 되지만, 용굴로 가기 위해서는 왼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용굴의 안쪽은 위가 뚫려 있어서 하늘이 보이는데, 앞서 얘기한 용굴설화 외에 용굴에서 살던 용이 승천하기 위해 위쪽이 뚫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용굴 앞쪽에는 맑은 샘이 솟아나고 있어 힘들게 돌계단을 올라온 사람들의 목을 축여준다. 원래 이 용굴 안에는 고려후기 조성으로 추정되는 단아한 양식의 석조유희보살좌상(石造遊戱菩薩坐像)이 전해지고 있었는데 도난당한 후, 최근에 새로 대리석으로 만든 관음보살좌상을 복원해 놓았다. 굴 안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니 일종의 석굴암인 셈이다.

 

용덕사 대웅보전, 미륵전, 범종각
용덕사 대웅보전, 미륵전, 범종각

◇용인을 대표하는 호국사찰

한편, 용덕사는 일제강점기 용인지역의 의병항쟁과 3·1만세운동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용인 양지면 출신 옥여(玉汝) 임경재(任景宰)(1872~1907)는 용인의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그는 1907년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의 정국을 개탄하며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 기병대와 이천, 광주, 용인, 죽산 등지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는데, 이 용덕사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을 치루기도 하였다. 그리고 용인 최초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원삼면 좌찬고개에서 시작되었다. 좌항리, 가좌리, 사암리, 맹리, 문촌리 등에서 집결한 주민 수백 명이 백암으로 이동하다가 일제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해산되었으며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3월 2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23일 용덕사 승려들이 독립선언서를 마을에 배포하고 거국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불교계에서 앞장서서 나라를 지키곤 했다. 그리고 용인에서도 역사의 곳곳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선 승려들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 처인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윤후 승장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병자호란 당시 유일한 승리를 거둔 광교산 전투에 용인 서봉사의 승려들이 참여했었다. 그리고 약 100여 년 전에는 바로 이 용덕사의 승려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지금은 맑은 계곡과 푸른 숲 안에 자리한 조용하고 고즈넉한 사찰이지만 용인을 대표하는 호국사찰로서 용덕사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만하다.

이서현 용인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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