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 째 편지 
서장은 살폈도다. 나라 일이 여기까지 이른 것은 실로 과인의 죄이라 망극하기 그지 없도다. 보내신 바를 받고 보니 느낌이 많도다. 여기 백주 6필과 백저포 4필을 보내니 돌아가서 노모에게 올리고 상화지(고급한지) 10권은 군영에 돌아와서 문방으로 행용하도록 바라노라. 
정유(1597)년 국월 중양후 3일(9월11일) 
등불아래서 씀 

8번 째 편지
무양하다는 서신을 들으니 기쁘고 안심하고 찰직한다니 좋도다. 전일의 뜬말에 어찌 개의할 것인가. 보내주신 것은 감히 뿌리치지 못하니 미안하고 그 성의에 깊이 감사하도다. 여기 박물이나 정표이니 싫어말고 받아주면 다행이겠노라. 말씀하신 일은 실행하려면 어렵지 아니하나 이미 새 장수가 천거되어 제수되었으니 빨랐는지 모르겠도다. 후에 세를 보아 마땅히 처리하리로다. 

계개(計開)
아청단 1필, 초록비단 1필, 심향색 명주 1필, 모 단 1필, 초록명주 2필, 백저포 2필, 청원향 1봉, 천지다 2봉, 황모필 20지, 저모필 15지

위의 붓은 지난번에 보내온 것을 명하여 만든 것이니 사용하시면 다행이겠고, 다시 바라기는 북도(北道)의 저모(猪毛)가 길수록 가하나 2촌 또는 3촌 되는 것으로 대필을 만들었으면 하니 깎든 아니 깎든 불구하며 반드시 동절(冬節)이 아니래도 좋다. 
무술(1598) 임종 념8일(6월28일) 

이번에 소개되는 두 편의 편지에서는 송언신의 모친까지 챙기는 세심함과 대규모의 선물을 보내는 선조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번째 편지
3번째 편지

◇실록에도 나오는 송언신의 모친

선조가 송언신에게 보낸 12편의 비밀편지 가운데 3번째 편지를 포함해 2편에서 송언신의 모친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또 선조가 따로 신경까지 썼던 송언신의 모친에 대한 내용은 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선조 25년인 1592년 6월 26일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송언신이 보고한 내용에는 "밤 삼경(三更)에 말 한 필에 종 하나를 데리고 간신히 (평양)보통문(普通門)을 빠져나왔습니다. 신의 ‘어미’가 영변(寧邊)에 있으므로 신이 영변으로 달려가니(중략)"라고 쓰여 있다.  

송언신의 모친이 전쟁 초기 평안도 영변까지 피난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선조 32년(1599년) 2월 25일 실록에는 송언신은 모친의 병을 이유로 해직을 신청한 것이 기록돼 있다.  

나이든 몸으로 피난은 무리였을까. 송언신이 해직을 신청하고 얼마 뒤 송언신의 모친은 사망한 듯하다. 

모친의 사망은 송언신의 해직 신청 2달 뒤 선조가 보낸 12번째 편지(1599년 4월)에서 확인된다. 

8번 째 편지-1
8번 째 편지-1

◇이순신에게도 보내지 않은 선물

선조의 비밀편지 12편의 편지 가운데 현재까지 11편의 편지가 소개돼 왕과 신하의 이런 행위가 흔한 일로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임금의 친필 편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혜이자 은전이다.

충무공 이순신 역시 전선에서 바쁜 시기 남해지역의 물건을 모아 선조에게 보냈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에 대해 선조가 답신을 보내거나 답례품을 보냈다는 기록은 없다.

8번 째 편지-2
8번 째 편지-2

그러니 송언신이 마치 펜팔처럼 임금인 선조와 소소한일부터 국정까지 비밀편지를 통해 친근하게 공유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일인 것이다.

더불어 매번 선물을 보내는 것 역시 드문 경우라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8번째 편지에서는 비단 등 각종 옷감과 붓, 향료, 차 등 대규모의 선물을 보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사이에서는 ‘증답경제’라고 해서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생계를 꾸려가는 방식이 있었다.

증답경제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식료품, 생활소품, 문방구 등 생필품을 주고받은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대부 사이에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일은 흔한 일이지만 신하가 왕에게 물건을 보내는 일은 공식적인 세금(진상품)을 납부하는 경우뿐이다.

왕 역시 공식적으로 선물과 포상을 내린다. 따라서 이처럼 왕과 신하가 사적으로 선물을 주고받은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희귀한 경우다.

또 송언신의 선물은 공식적인 납부 형태가 아니라 사적으로 왕에게 보내는 것이라 일면 최고 권력자에 대한 뇌물로 보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조준호 학예사의 해설에서 깊게 알아볼 수 있다.

안형철기자


*송언신이 함경도관찰사로 온 뒤 몇 차례 휘하 장수에 대한 포상을 요청한 기록은 있으나, 편지와 비슷한 시기에 관련된 기록은 안타깝게도 확인되지 않는다.

**앞서 송언신이 보낸(6번째 편지, 1598년 2월 6일) 붓 재료가 퍽 맘에 든 듯 선조는 큰붓을 만들고 싶다며 붓 재료인 함경도의 돼지털을 다시금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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