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호 경기도박물관 수석학예사
조준호 경기도박물관 수석학예사

◇송언신이 선조에게 보낸 물건의 성격, 뇌물인가?

이 부분은 조선시대 ‘진상제(進上) 제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조선시대 지방관이 국왕과 왕실에 필요한 물품을 정기적으로 바치는 진상(進上)은 조선 특유의 제도였습니다. ‘진상’은 ‘예헌禮獻’이라고도 불렸는데 초기에는 지방관이 국왕에게 예물(禮物)을 바치는 행위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조세의 한 부분으로 법전에 수록되었습니다. 관찰사·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 등은 진상품을 월 1회 납부하는 것이 관행화되었고, 경기도 지역 수령의 경우 왕실 운영에 필요한 막대한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매일 진상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진상제도는 임진왜란시 일시 중지되었습니다. 특히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 등 북으로 피난을 가고, 일본군의 진격으로 조선의 지방통치가 붕괴되었던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선조가 송언신에게 보낸 편지에도 당시 진상제가 폐지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변란 이후로 이미 방물方物이 폐지하였으니 이는 내가 까닭없이 많이 얻는 불평과 번거로움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니 감히 무릅쓰고 구한다면 많이 보내시라."(1597년 6월 11일)

편지에도 드러나듯 선조는 왕실로 올라오는 방물을 지금 형편상 모두 폐지했지만, 왕실에 소용되는 물품들이 많으니 형편이 되는 함경감사 송언신에게 가능한 많이 보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공식적인 진상은 폐지했지만, 궁핍한 왕실 살림살이에 대한 국왕의 근심이 위의 편지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시 함경도는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 직접적인 전란에 휩쓸리지 않았기에 이러한 지역적 사정을 감안하여 선조는 송언신에게 진상품을 요청하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조의 어필을 목판으로 새겨서 인출한 8폭 병풍으로 다양한 시구가 적혀있다. 현존하는 선조의 글씨가 있는 병풍은 현재 속리산 법주사 소장의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8호로 지정된 병풍과 1,2폭만 남아 있는 장서각본이 유일하다. 속리산 법주사 소장의 병풍은 위 작품과 같은 시구가 적혀 있다. 이에 대해 평소 법주사의 부속암자인 중사자암(中獅子菴)을 즐겨 찾고 그 남쪽에 원당(願堂)을 짓기도 했던 선조가 당시(唐詩)를 써서 하사했다는 설과 세자의 사부인 송소 권우(松巢 權宇, 1550~1590)에게 써준 것이라는 설이 전한다.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선조의 어필을 목판으로 새겨서 인출한 8폭 병풍으로 다양한 시구가 적혀있다. 현존하는 선조의 글씨가 있는 병풍은 현재 속리산 법주사 소장의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8호로 지정된 병풍과 1,2폭만 남아 있는 장서각본이 유일하다. 속리산 법주사 소장의 병풍은 위 작품과 같은 시구가 적혀 있다. 이에 대해 평소 법주사의 부속암자인 중사자암(中獅子菴)을 즐겨 찾고 그 남쪽에 원당(願堂)을 짓기도 했던 선조가 당시(唐詩)를 써서 하사했다는 설과 세자의 사부인 송소 권우(松巢 權宇, 1550~1590)에게 써준 것이라는 설이 전한다.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송언신에게 내린 친필 편지의 의미는?

조선시대 국왕이 신하들에게 내리는 명령은 ‘유서諭書’, ‘교서敎書’ 등이라 합니다. 이들 공식 명령서의 경우 임금이 직접 쓰는 경우는 드물고 승정원의 관료들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대신 작성하여 반포합니다. 이와 같은 공식 문서 외에 어필(御筆)과 어찰(御札) 등은 매우 특별한 은전(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혜택)에 해당됩니다. 임금으로부터 직접 글을 받는 경우 신하들은 특별한 성은(聖恩)에 감격하며 길이 집안의 보물로 간직해 왔습니다.

선조가 송언신에게 내린 여러 편의 친필 간찰은 매우 특별한 은전에 해당합니다. 전란이라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임금이 친히 작성한 친필이 지니는 정치적인 비중은 매우 높다고 하겠습니다. 선조는 친필 편지를 통해 송언신에 대한 신뢰를 거듭 보여주고 있었고 이러한 선조의 총애는 전란이후 송언신의 정치적 진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준호 경기도박물관 수석학예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