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북한산 수려한 산세 속에 위치한 석굴암.
도봉산·북한산 수려한 산세 속에 위치한 석굴암.

북한산과 도봉산이 위치한 북한산국립공원은 보기 드문 도심 속 자연공원으로 그 산세가 아름다워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공원은 우이령을 경계로 북쪽으로는 도봉산, 남쪽으로는 북한산으로 나뉘는데 화강암 지반이 침식되고 오랜 세월 풍화되면서 곳곳에 깎아지르듯 자리한 도봉산의 바위 봉우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낸다. 도봉산의 주봉인 자운봉에서 남쪽으로 만장봉, 선인봉이 있고, 서남쪽으로 관음봉이 있는데 이 곳 중턱에 오늘의 석굴암이 있다.

석굴암은 ‘석굴암중수기(石窟庵重修記)’ 에 이르기를 ‘위로는 도봉이 치닫고 아래로는 삼각산 자락이 빙 둘러 모여 있어 마치 많은 별들이 북극성을 껴안아 감싸고 있는 것 같다’라는 내용으로 암자의 비경을 자랑하고 있는데 과연 사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 설명이 과장이 아님을 몸소 느낄 수 있다.

석굴암에 오르려면 우이령길이라고 불리는 국립공원 내 산책길을 따라야 한다. 우이령길은 서울 우이동과 양주 교현리를 연결하는 작은 길로, 1968년 무장공비의 청와대 침투사건으로 인해 민간인의 출입이 전면 금지되었었다. 2009년 7월 이후 탐방 예약제로 개방되어 우이령 계곡과 숲을 함께 느낄 수 있으며 맨발 체험이 가능하여 현재도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석굴암 전경. 
석굴암 전경. 

◇석굴암의 창건

석굴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석굴암의 창건 및 연혁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신라 문무왕 대 의상대사(義湘大師)에 의해 처음 세워졌으며 고려시대 공민왕 시절 왕사를 지냈던 나옹화상(懶翁和尙)이 3년간 수행했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석굴암’이라는 절 이름은 법당 옆에 거대한 석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여러사찰이 그러하듯 석굴암의 창건과 관련한 정확한 기록을 찾는 것은 어렵지만 ‘봉선사본말사지(奉先寺本末寺誌)’ 제2편 ‘석굴암중수기’의 내용으로 보아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의 원당으로 늦어도 15세기 중엽 경에는 건립되어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석굴암은 수차례 폐사와 중창을 반복하다가 한국전쟁으로 전각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법당은 완전히 전소되고,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석굴안에는 전화로 인해 아미타불, 지장보살, 나한과 수구다라니 목판만 남아 있고 모두 파손되었다고 한다. 이후 1954년부터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주지로 부임하신 초안스님에 의해 중창 복원되었다. 1975년 대웅전 중수를 시작으로 신성각, 칠성각, 칠성탱화, 양사탱화 등을 조성·봉안함으로써 오늘날의 석굴암 기틀이 마련되었다.

◇생동감과 개성 넘치는 석조불좌상, 석조지장보살좌상, 석조나한상

석굴암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가 3점 봉안되어 있다. 석조불좌상, 석조지장보살좌상, 석조나한상으로 모두 2011년 지정되었다.

석조불좌상.
석조불좌상.

양주 석굴암 석조불좌상은 대웅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불이다. 석조불좌상은 석조지장보살좌상과 같이 경기도에서 흔하지 않은 경주 불석으로 제작했으며, 표면에는 금을 입혔다. 불석은 경상북도 경주에서 산출되는 돌로 무른 특성으로 인해 조각하기 용이하여 17세기경부터 불상의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42cm의 작은 불상으로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게 표현되어있고 허리는 짧고 무릎이 높다. 또 양팔을 몸에 붙여 신체를 하나의 덩어리처럼 표현한 부분들이 조선 후기 석조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석조불좌상은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수그린 자세로 머리가 크게 표현되고 목이 짧다. 머리는 옥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나발의 표현 또한 간결하다. 각진 얼굴에는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가고, 도톰하고 짧은 코 아래로 자리한 입술에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두 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여 다리 위에 가볍게 내려놓고 있다. 대의는 양 어깨에 걸쳐진 위로 또 다른 자락이 그 일부를 덮고 있는 소위 ‘이중착의’라 부르는 형식이다. 양 어깨에 걸쳐져 신체 전면을 덮고 있는 통견의는 양쪽 어깨에서 한겹 접혔으며, 가슴에는 치마의 굵은 단이 수평으로 드러나 있는데 수평으로 묶어 주름이 보이지 않는다.

석조지장보살좌상. 
석조지장보살좌상. 

석굴암 석조지장보살좌상은 삼성각에 봉안된 보살상이다. 석조불좌상과 마찬가지로 경주 불석으로 제작했으며 표면에는 금을 입혔다. 높이는 48cm로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상체에 비해 무릎이 상당히 높아 비례가 조화롭지 않은 점, 양팔을 몸에 붙여 단순화한 자세와 평면적인 신체와 옷의 표현 등에서 석굴암의 다른 불상과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오른손은 가볍게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은 다리 중앙에 놓고 손바닥에 보배 구슬을 받들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으며 두건 자락이 양어깨까지 가지런히 늘어져 있다. 각진 얼굴에는 가늘게 표현된 눈, 두툼한 코, 굳게 다문 입이 자뭇 진지하다. ‘봉선사본말사지’에 의하면 이 보살상은 1873년 이진명행(李進明行)이 발원하여 한봉당 창엽(漢峰堂 창曄)과 그의 은부인 금곡당 영환(金谷堂 永煥)이 제작하였다고 한다. 한봉당 창엽은 19세기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불화승이다.

석조나한상.
석조나한상.

석굴암 석조나한상은 나한전에 봉안되어 있다. 방형의 높은 연화대좌에 앉은 높이 60cm정도의 중형불상으로, 광배는 근래 제작된 것이다.

얼굴과 손발에는 호분이 칠해져 있고, 대의에는 검은 옻칠이 입혀져 있다. 머리가 약간 커보이지만 무릎의 폭이 넓어지고 높이가 높아져 지장보살상보다는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적절한 신체비례를 보인다. 넓적한 얼굴에 두툼한 코는 앞의 불상과 비슷하지만 이목구비는 한층 부드럽고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친근하게 느껴진다. 양팔을 몸에 붙여 신체를 한 덩어리처럼 표현하고 높은 무릎에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주름 표현 등을 통해 같은 승려에 의해 제작 또는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굴암은 나한기도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나한은 소원을 성취시켜주는 힘이 있다고 해 일찍이 신앙대상으로 존중되었던 만큼 여전히 많은 이들이 석굴암을 찾고 있다. 소원을 빌거나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석굴암은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가볼 가치가 있는 사찰이다. 우이령길을 따라 펼쳐진 도봉산의 수려한 산세를 눈에 담고 마침내 다 올랐을 때 맞이하는 고즈넉한 사찰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박지연 양주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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