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륭원, 또 다른 수원을 만들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그해, 조선에서는 정조가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며 현륭원(顯隆園)으로 명명하였다. 이에 수원은 읍치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는 역사적 대격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1800년 정조는 소원에 따라 아버지 곁에 묻혔다. 건릉(健陵)이다. 110년 뒤인 1899년 고종황제는 현륭원은 융릉(隆陵)으로 추봉하였다.

정조 이래 모든 국왕은 장헌세자의 직계 후손으로 왕위가 계승되었다. 장헌세자와 정조가 묻힌 수원 땅은 새로운 고향으로 여겼고, 이에 모든 국왕은 화성과 화령전 및 융·건릉을 참배했다. 국왕들의 지속적 능행과 화성에 대한 관심은 수원이 경기도의 여타 도시와 다르다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고, 서울과 경쟁하고자 하는 의식을 낳았다.
 

융릉- 헤르만 산더
1900년대 융릉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사진=수원화성박물관

조선시대 따라 배워야 할 군주의 모범은 정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전까지 따라 배워야 할 모범은 세종대왕이었지만 이후 정조대왕으로 바뀌었다. 매일같이 일기를 쓰고 방대한 문집을 남겼으며, 원행과 능행을 자주했던 정조대왕을 따라야 했다. 하물며 정조가 건설한 화성과 융·건릉은 체모가 엄중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직계 선조가 묻힌 융·건릉의 원찰이 바로 용주사였다. 여느 사찰과 비교할 수 없는 왕실의 관심과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셈이다. 비명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현륭원 조성은 왕릉에 버금가는 시설과 석물에 정성을 담았다. 화려한 병풍석과 장명등의 우아하면서도 찬란한 조각은 정조 자신이 묻힌 건릉(健陵)의 단조로움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병풍석을 쓰지 말라는 세조의 유언조차 무시한 채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하고 싶어했던 정조의 마음씀씀이를 볼 수 있다. 현륭원의 원찰로 건립된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때 창건된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 광종 때 전란으로 불타버려 잡초 우거진 채 버려져 있던 곳에 용주사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마지막 원찰, 통합정치를 꿈꾸다

용주사는 1790년(정조 14) 현륭원의 능침수호 사찰로 건설된 조선시대 마지막 원찰이다. 당대의 고승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삼고 중앙 관방과 8도 대관들이 시주한 8만 7천 냥으로 용주사를 건립한 것이다. 용주사는 다른 오랜 사찰들에 비해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여느 사찰에 비할 바 없는 위상과 사격을 부여받으며 나라를 대표하는 국찰로 대우받았다. 이는 정조의 꿈이기도 했다.

정조는 현륭원의 원찰인 용주사를 건립하면서 단순히 두부를 만들고 제향만 하는 조포사가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중심사찰로 만들어 불교계를 재편하면서 사상계를 통합하고자 했다. 이에 용주사 건립 비용을 국가 재정이 아닌 전국적으로 시주금을 통해 마련함으로써 재정 낭비라는 지탄을 피하고, 자신의 효심을 세상에 널리 드러냄과 동시에 장헌세자의 명예 회복을 대중적으로 공인받는 공론화 작업을 펼친 셈이다. 이에 임금 스스로 용주사 봉불기복게(龍珠寺奉佛祈福偈)를 짓고, 재상 채제공(蔡濟恭)에게는 용주사 대웅보전 상량문을 쓰게 하였고,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에게는 용주사 주련을 쓰게 함으로써 숭유억불의 이데올로기적 도그마를 깨는 상징성을 부여했다. 또한 대웅보전 후불탱화를 어진화사 김홍도 등과 승려들을 통해 그리게 하거나 대웅보전 삼세불을 봉안하는 날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게 한 것도 용주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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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어제 용주사 봉불기복게. 사진=수원화성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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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의 용주사상량문. 사진=수원화성박물관

특히 용주사 주지를 조선팔도를 총괄하는 승통(僧統)으로 임명하고, 남·북한산성의 승군들을 중심으로 하는 승군체제에 변화를 모색하고, 수원에 주둔한 장용영 외영을 강화하는 지역 방어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더욱이 용주사에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하사하여 불교의 효가 유교의 효와 다르지 않다는 점과 당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숭배로 인식하던 서학(西學)을 견제하려는 뜻도 있었다. 국왕의 효행을 통해 백성들에게 효성과 충성을 이끌어내고, 오래된 이단을 끌어안아 새로운 이단을 제어하는 정치적 포석이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 활동은 불교계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조선후기 르네상스기였던 숙종, 영조, 정조시대에 중창 불사가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화룡점정이 1790년 정조에 의해 용주사가 원찰로 건립되면서 그 경향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화산 용주사 -홍살문- (1900년대) 사진엽서
화산 용주사 -홍살문- (1900년대) 사진엽서. 사진=수원화성박물관

◇용주사가 특별한 이유

용주사는 평지에 자리 잡아 일주문인 산문(山門)이 없다. 최근에 조성된 사천왕문을 들어와 매표소를 지나면 눈에 들어 오는 것은 길을 따라 자연석에 글자를 새겨 세워 놓은 선돌들이다. 가장 앞자리에 ‘도차문래 막존지해(到此門來 莫存知解)’라고 음각된 화강암이 양쪽에 서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니, 어쭙잖은 사바세계의 알음알이로 덤벼들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한 선돌의 주장과 영접을 속에 홍살문과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을 만나게 된다. 홍살문과 삼문 또한 용주사가 왕실의 원찰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절집에 홍살문의 존재는 사도세자 위패를 모신 신성공간이라는 표식이다. 양반사대부의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을 지나면 고려시대 5층 석탑 뒤로 웅장하게 서 있는 천보루(天保樓)가 시야에 들어온다. 천보루! 국왕의 만수무강과 왕실의 번창을 기리는 의미를 지닌다. 원찰이라 그러한 거창한 이름의 누각을 세울 수 있었으리라. 대웅보전과 함께 창건 당시에 건립되어 주불전으로 가는 출입구의 구실을 하고 있다. 아래 돌기둥의 웅장함은 경복궁 경회루 돌기둥을 닮아 있다. 천보루를 지나면 앞에 대웅전이 서고 양옆으로 거대한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각기 뜰이 있는 口자 모양의 건물이다. 더욱이 툇마루가 달린 건물양식은 일반 절집의 모양이 아니다. 원행에 따라 나선 사람들의 숙박을 배려한 건축양식인 셈이다. 대웅보전 후불탱화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음양법을 수용한 서양화풍으로 유명하다. 또한 용주사가 효의 도량임을 알리는 부모은중경을 새긴 탑이 대웅전과 지장전 사이에 서 있다. 정조 때 부모은중경을 새긴 목판과 순조가 하사한 동판, 석판이 오늘도 단정하게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에도 있다. 이들은 모두 용주사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용주사 범종
국보 용주사 범종. 사진=수원화성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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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 천보루 - 명승고적 30. 六.. 七. 龍珠寺.(水原)- 중박 유리건판. 사진=수원화성박물관

대웅전의 왼쪽 범종각에는 국보 120호인 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범종이 있다. 비천상이 양편으로 두 곳에 돋을새김되어 있고 삼존불이 한 곳에 조각되어 있는 유려한 범종이다. 범종의 가운데는 음각으로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주조 당시에 새긴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인 1923년 당시 주지 강대련 스님이 새겨 넣은 것이다. 한국의 동종은 국제적 학명으로 '코리안 벨(Korean Bell)'로 불리는 독창성을 자랑한다. 국보로 지정된 한국의 동종은 4개에 불과한데, 상원사 동종과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천흥사 동종과 용주사 동종이다.

◇호성전과 다양한 문화행사

용주사의 존재 이유는 본래 호성전(護聖殿)에 있었다. 호성전은 장조의황제(사도세자), 헌경의황후(혜경궁)와 정조선황제, 효의선황후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매년 적어도 6번 이상의 제향을 지냈다. 최영년(崔永年, 1856~1935)의 ‘해동죽지(海東竹枝)’(1925)에는 전국적 명물 ‘수원 약과(藥果)’를 언급하고 있다. "수원군 용주사에서 아주 잘 만드는데, 이 약과는 융릉에 제향하는 제수로 그 품격이 최고다.(水原郡龍珠寺 精造此果 供隆陵祭享之需 品爲極嘉)"라 적고 있다.

주사 전경(가운데 호성전)-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수원화성박물관
주사 전경(가운데 호성전)-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수원화성박물관

수원 약과는 이미 조선 전기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물로 대접받아 양녕대군이 대접받았고, 병중의 인조 임금에게 입맛을 돋우기 위해 수원약과를 원했을 정도였다. 제향에 쓰였던 용주사 약과를 다시금 맛보고 싶은 것은 헛된 꿈일까?

친일승려의 대표였던 강대련 스님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용주사는 해방 이후 1955년 비구·대처 분규를 빚으며 거듭났다. 1962년 관응 스님이 주지가 되면서 용주사는 안정을 찾게 되었고, 1969년 전강스님이 중앙선원을 개설하면서 용주사는 제2교구 본사로서 위상과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게 지엄하던 호성전이 6.25전쟁 때 불타 사라졌다가 38년만인 1988년에 복원될 수 있었다. 이는 한국불교계가 중흥기를 맞이했음과 동시에 용주사가 자기 정체성을 확보한 사례라 하겠다. 2020년 8월 20일 새벽 화재로 호성전이 다시 전소되었다. 전쟁 때가 아닌 평시에 호성전이 불탄 것에 대한 용주사 내부의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전과 달리 호성전 복원이 빠르게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용주사 사진- 대웅보전 앞 화성군민의날 행사 기념
용주사 사진- 대웅보전 앞 화성군민의날 행사 기념- 박찬문 소장

1938년 가을 용주사 대재(大齋)가 열려 승무 등 다양한 행사가 베풀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19살의 조지훈(1920~1968)이 용주사를 찾았다. 그날 이름 모를 승려의 승무를 보고 난 감동으로 밤늦게까지 절 뒷마당 감나무 아래서 넋을 잃고 서 있었던 그는 최승희의 승무와 이왕직의 아악 그리고 김은호 화백의 승무 그림까지 섭렵한 뒤 1939년 잡지 ‘문장(文章)’에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라는 절창을 담은 시 ‘승무’를 발표하였다. 이에 2004년 10월 ‘승무’ 시비가 용주사에 건립되어 창작의 산실임을 알렸다. 용주사는 그렇게 다양한 문화예술의 공간이었다. 조선시대에도 부처님 오신날은 인근 주민들이 찾는 명소였다. 그렇게 용주사는 지역과 함께 할 때 빛이 났던 곳이다.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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