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과 용문산 전경. 사진=양평관광사진공모전
양평과 용문산 전경. 사진=양평관광사진공모전

예로부터 양평은 용문산을 의지하고 호수를 베고 누운 땅이라고 했다. 양평의 주산인 용문산 주변을 북한강과 남한강이 휘감아 흐른다. 이 두 강은 양평 서쪽 끝 양수리(두물머리)에서 만나 진정한 한강을 이룬다. 풍광이 뛰어나 산수화에나 나올 법한 땅이다.

그런데 용문산은 높고 험했으며 강물은 그 물살이 빨라 경영하기 쉽지 않았다. 너른 들이나 비옥한 곡창지대는 이웃 고을에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용문산을 뜯어 먹고 여울을 타면서 대대로 고단한 삶을 살았다. 특히 고적(古跡)부터 임금 진상물까지 용문산을 알차게 뜯어 먹었음이 각종 역사책에 기록되어져 있다.

용문산에는 불교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확인된 관련 유적이 10개소에 이른다고 하니 가히 경주 남산에 버금갈 정도라는 평가를 납득할만하다. 이 가운데 용문사, 상원사, 그리고 사나사가 각기 골 안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같은 용문산 계곡에 있지만 이 세 고찰이 지역민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사나사가 마음의 안식처 같은 곳이라면 상원사는 고즈넉한 불교 선원이다.

해동지도 지평현의 용문산 불교 유적. 사진=서울대학교규장각
해동지도 지평현의 용문산 불교 유적. 사진=서울대학교규장각

 

◇ 양평 대표가람 용문사
용문사는 엄숙한 가람이면서도 대외적으로 ‘성공한 맏아들’ 같다. 무엇보다 경내에 있는 천 년 은행나무가 있기에 지역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또한 별다른 품을 안 들였음에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산나물로 지역민은 생계를 오랫동안 기댈 수 있었다. 나아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휴식 관광지’로 이름이 높기에 자연스럽게 절 아래에 마을을 이루며 삶을 영위해 왔다.

용문사 전경. 사진 중앙의 철탑은 은행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피뢰침이다. 사진=양평군청
용문사 전경. 사진 중앙의 철탑은 은행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피뢰침이다. 사진=양평군청

양평 용문사는 지역의 대표 가람(伽藍)으로써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남양주 봉선사의 말사이다. 옛 선현은 용문사가 있기에 용문산이란 이름이 따라 온 것이라고 했다. 용문산의 다른 이름인 미지(彌智) 역시 용(龍)의 순 우리말인 미르와 관련이 있다. 용문사의 창건 연대에 관한 이야기는 꽤나 다양하다. 7세기 중엽 진덕여왕 시절 원효대사가 창건 했다는 설, 약 300 여 년 뒤 신라 신덕왕 때인 서기 913년 대경대사가 창건했다는 설 등이 있다. 아마도 용문사 경내에 있는 저 유명한 은행나무의 수령이 1천100~1천500년으로 추정됨을 상기해보면 어느 설을 따르던 고개가 끄덕여진다.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 부도 및 비. 1398년(조선 태조7)에 건립되었으며 용문사 경내 동쪽 산록에 있다. 정지국사 지천의 승탑과 탑비로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권근 비문을 지었다.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 부도 및 비. 1398년(조선 태조7)에 건립되었으며 용문사 경내 동쪽 산록에 있다. 정지국사 지천의 승탑과 탑비로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권근 비문을 지었다.

창건 이후 용문사는 모름지기 용문산 대가람으로서써 그 면모를 갖춰갔다. 14세기 고려 우왕 때 정지국사(正智國師) 지천(智泉)이 개성 경천사에서 가져온 대장경 1질을 보관키 위해 3칸의 대장전을 지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용문사는 조선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여러 번의 중창을 거쳤다. 14세기 말 조안(祖眼)이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고, 15세기 중엽 세조가 자신의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를 위해 중수를 하는 등 19세기까지 크고 작은 중수 기록이 전해진다.

보물 제1790호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14세기 중반에 제작된 정교한 불상으로 고려시대 개성의 전문장인집단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양평군청
보물 제1790호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14세기 중반에 제작된 정교한 불상으로 고려시대 개성의 전문장인집단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양평군청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지만 지금의 용문사에서선 고풍스런 가람의 풍모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 구한말 이후 사찰이 2차례에 걸쳐 전소되면서 전각 대부분이 근래에 조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1907년 정미의병 항쟁기 당시 의병의 근거지였던 탓에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지는 수난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구한말 항일의병의 최초 의거지인 양평지역은 남한강을 따라 늘어선 일백 여리의 마을이 불태워지는 참사를 겪은 바 있다. 이때 용문산 내 사나사와 상원사 역시 한 두 달 시간차를 두고 함께 전소되다시피 했다.

한바탕 화마가 할퀴고 간 후 다시금 사찰의 명맥을 이은 것은 큰 방이 중건된 1909년이다. 1938년이 되어 비로소 대웅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 등을 갖추었으나 6.25전쟁으로 다시금 소실되었다. 이후 1950년대 말에 재건을 시작하여 1982년부터 본격적인 불사 중창 사업을 시작했다. 대웅전, 관음전, 지장전, 미소전(오백나한전), 산령각, 칠성각, 요사채, 일주문, 템플스테이 수련관,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른다.

 

◇2조 원의 가치가 넘을 똥낭구, 용문사 은행나무
조선시대의 용문사가 왕실의 각별한 원찰 가운데 한 곳이라서 사람의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면, 근대 이후는 단연코 천연기념물 제30호 용문사 은행나무가 경내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살아있는 화석은 한때 최대 높이가 67m에 달했고 둘레는 무려 16m에 이르는 등 유실수 가운데 동양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졌다. 약 20여 년 전에 한 공중파 방송에서 전문가를 대동하여 그 가치를 평가한 적이 있는데 당시 화폐가치로 1조7천억 원이었다. 물론, 이 추정치는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일 뿐 진정한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란 조건을 달았음은 당연하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오랫 세월 사람과 함께 살아 온 탓에 불리는 이름도 다양하고 얽힌 이야기도 풍성하다. 이 공손수(公孫樹)를 지칭하는 말은 시기에 따라 그리고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세간에서 신목(神木)이라하니 조선 태종이 친히 거둥하여 ‘세상 모든 나무의 왕’으로 칭하였고, 그 아들(세종)은 당상직첩을 내려 추앙하였다. 불타 없어진 사천왕문을 대신한다고 하여 천왕목(天王木), 수차례의 전쟁이나 변고에도 굳건하니 호국목(護國木)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나고 자란 지역의 촌노(村老)라면 누구나 저 은행나무가 6.25가 발발하기 전에 구슬피 울었던 소리를 기억하고 또 그 소리를 흉내 낼 수 있다. 또 누구에게는 흰 쌀 한 말을 바치고 치성을 드리면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옥동자를 얻을 수 있다하여 사랑목으로 회자 되기도 한다.

가을의 용문사 은행나무. 공식 크기는 높이 42m 둘레14m이다. 산 아래 평지의 은행나무 잎이 모두 떨어질 즈음에서야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점이 신비롭다. 사진=양평관광사진공모전
가을의 용문사 은행나무. 공식 크기는 높이 42m 둘레14m이다. 산 아래 평지의 은행나무 잎이 모두 떨어질 즈음에서야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점이 신비롭다. 사진=양평관광사진공모전

은행나무 식목 설화는 크게 두 가지가 전한다. 심은 사람은 달라도 모두 지팡이라는 점은 같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서기 935년 고려에 투항한다. 이후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는 망국의 설움을 짊어지고 한 평생 은둔코자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용문사에 머물면서 지팡이를 땅에 꽂았고 은행나무는 그 지팡이가 자란 것이란다. 또 다른 이야기는 연대가 앞선 것인데 신라 고승 의상대사의 지팡이 식목설이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그 수령에 비해 식생상태가 우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무의 큰 뿌리 하나가 동쪽 계곡의 맑은 물에서 수분을 섭취하고 또 다른 뿌리는 남쪽의 해우소(解憂所 화장실)에서 풍부한 영양공급을 받는다. 이와 관련해서 용문사 해우소를 청소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40여 년 만에 대대적으로 해우소를 청소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치우려니 인분은 온데간데없고 플라스틱 등의 오물만 나오더란다. 그야말로 이 거대한 ‘똥낭구’에게 꼭 필요한 질 높은 자양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의 충분한 공급이면 매년 10가마에 육박하는 은행 알 수확도 충분히 가능할 듯하다.

 

◇묵객부터 하이커까지, 역사가 있는 인기 행선지
용문사가 오래 전부터 대중에게 인기 있는 행선지가 된 연유에는 교통의 발달도 한 몫 했다. 그 옛날 조운이 발달하고 뱃길을 이용하여 금강산을 가던 조선시대의 묵객들은 저마다 용문산과 용문사의 경승을 찬탄하면서 숙제처럼 시를 지어 남겼다.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로 넘어와 신작로가 개설되고 철도가 부설되는 1940년대 이후에는 본격적인 관광을 위한 ‘하이커들을 위한 하이킹’의 명소로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용문사 수학여행. 사진=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소장
1960년대 용문사 수학여행. 사진=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소장

이때 용문산과 용문사를 방문하는 하이커들의 하이킹 소개글이나 답사기를 보면 요즘의 여행블로그를 연상케 한다. 교통편, 볼거리, 먹을거리, 소요시간 등 다채롭고 자세하다. 이후 레저생활이 정착해 가면서 수학여행, MT, 야유회 행선지로도 인기가 많아 용문사 아래 사하촌은 물론이고 기차가 닿는 용문역이 번성했음은 두말 나위 없다. ‘일요일이나 축제일을 이용하여 수많은 하이커들이 찾아갈 것’이라며 ‘용문산과 용문사의 이름은 도시인에게 한적한’ 여유를 줄 것이라고 한 하이커가 이미 1940년대에 예측했었는데 그대로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평 용문사, 자비심으로 열린 도량
이처럼 용문사는 대중에게 열린 도량이다. 산사에 홀로 은거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용문사 은행나무가 천 년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사람의 인분이었듯 용문사 역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찰이다.

이제 용문사는 대규모의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며 시간에 쫓기듯 살아 온 도시인에게 여유와 휴식을 주고 있다. ‘나를 쉬다’, ‘나를 챙기다’를 주제로 시의적절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사람의 쉼을 돕는다. 사찰 프로그램과 잘 어울리는 명상, 요가, 염주 만들기, 소원 쓰기 등 프로그램도 있지만, 열린 도량으로서 용문사를 다시 보게 되는 프로그램은 피자 먹기이다. 이 엉뚱한 이국적 음식의 포용에서 활짝 열린 자비심이 보인다. 고요한 산사에서 먹는 따끈한 피자의 맛은 어떨까 자못 궁금해진다.

지역민 또한 용문사와 함께 하는 것에 소홀하지 않았다. 해마다 은행나무를 위한 영목제(靈木祭)를 지낸다. 축제를 열고 나아가 은행나무를 지역의 상징을 삼았다. 진심으로 은행나무의 안위를 위하는 마음이고 경외의 마음을 담아 동일시(同一視)하고 있다. 이것은 꼭 앞으로 더 오랫동안 용문산을 뜯어먹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양평 사람에게 용문사는 타지인도 다 알고 있는 우리만의 것 즉, 자랑하고 싶은 무언가 이자 후손들에게 오래도록 이어져야할 자부심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강웅 양평군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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