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人Story]

다문화인 200만 시대다. 주위를 둘러보면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관념은 아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중부일보는 이에 대한 간극을 좁히고자 ‘다문화人Story’를 연재한다. ‘다문화人Story’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다문화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소개하고 우리 사회의 변화를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네팔 출신 구릉 굽더 바하들(55) 씨는 지난 1992년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왔다. 그가 가지고 있던 비자는 15일짜리 단기 여행 비자.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지기엔 불가능했다. 이후 험하고 어려운 일을 도맡았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하루가 멀다하고 그만두는 봉제공장에서 매일 20시간씩 일했다. 월급은 한국인의 절반도 못 받고 처우도 형편없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유는 단 하나.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지금은 식당 4곳 운영하는 어엿한 사장님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 오기 전 교사인 아버지 밑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자랐던 구릉 굽더 바하들 씨. 그가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 신분을 뚫고 한국에서 자리를 잡기까지 30여 년의 여정은 길고 험난했다. 그에게 코리안 드림은 무엇이었을까. 경기도 수원에 있는 그의 식당에서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한국행을 결심한 이유는 뭔가.
다른 집들에 비하면 우리집은 그렇게 가난하진 않았다. 아버지가 교사였기 때문에 먹고는 살았다. 하지만 내가 6남매의 장남이다 보니 어깨가 무거웠다. 그래서 일찍 일을 시작했다. 교사를 시작으로 식당과 마트 운영 등 여러 가지 일을 경험했다. 그러다 보니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외국을 오가던 보따리상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이란 나라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Q.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무슨 일을 했나.
내가 가진 비자는 15일짜리였다. 한국에 오래 머물 수도, 일을 할 수도 없었다. 일단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의 길을 택했다. 처음 간 곳은 청량리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보따리상이 청량리에 큰 호텔이 있으니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다 한 봉제공장 사장을 만났다. 하루 8~9시간 정도 일하면 월급으로 40~45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Q. 공장일은 어땠나.
힘들었다. 하루에 8~9시간만 일하면 된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20시간씩 일했다. 바쁠 때는 3일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어느 날은 재봉틀 아래 비어 있는 작은 공간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공장장이 내가 도망간 줄 알고 화를 많이 냈단다. 월급도 약속과 달랐다. 분명히 한 달에 40~45만 원을 준다고 했는데 손에 쥔 건 고작 24만 원 정도였다.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등록 외국인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 반 정도를 버티다 다른 봉제공장으로 옮겼다.

Q. 이직한 곳은 좀 나았나.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일을 잘했다(웃음). 재봉틀도 돌릴 줄 알고, 재단도 하고, 바느질도 잘했다. 세 사람 몫을 해냈다. 청량리 공장에서 일할 때보다 많은 월급을 받았다. 60~70만 원 정도 됐던 것 같다. 처음에 비해 두 배 이상이 뛴 셈이다. 한 2년 정도 경력을 쌓아 또 다른 봉제공장으로 이직을 했다. 거기서는 100만 원을 받았다. 실력이 쌓이니까 대우도 달라졌다. 주변 사람들과도 서로 별명을 부르는 등 편하게 지냈다.

Q. 그래도 미등록 외국인이였기에 맘이 편치 않았을 것 같다.
한국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은 경찰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아파트에도, 택시나 버스에도 경찰들이 있었다. 옷이 경찰 제복과 비슷해 그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웃음). 지금은 농담처럼 얘기하지만 그때는 늘 조마조마했다. 미등록이 발각된다는 건 사망선고와도 같기 때문이다. 한국에 오기 위해 많은 돈을 썼는데 한순간에 쫓겨 나버리면 삶의 기반이 무너진다. 일에 빠져 살았지만 항상 한구석으로 불안했다.

Q. 봉제 기술자로 자리를 잡았는데 왜 사업을 시작했나.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1997년 말 IMF 사태가 터지면서 공장이 많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직원들 월급이 적게는 25%, 많게는 50%까지 삭감됐다. 내 월급도 25% 정도 깎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모두 깎인 게 아니었다. 여자 직원들과 내 월급만 깎인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유를 따져 묻지 않았지만 내가 미등록 외국인이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했다. 속이 많이 상했다.

다른 하나는 한국인 아내와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외국인은 돈을 제대로 못 벌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그때 아내한테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이 200만 원 벌면 나는 400만 원 벌고, 당신이 400만 원 벌면 나는 4천만 원 벌 거야."

그렇게 편견과 차별을 겪다 보니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업을 준비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미등록 사실이 적발되면서 네팔로 추방됐기 때문이다.

Q. 어떻게 한국에 돌아왔나.
네팔에 가자마자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 준비를 했다. 당시 아내와 딸이 함께 갔는데 혼인신고도 하고 여권도 새로 발급받았다. 다행히 운이 따라줘서 결혼이민 비자를 받아 한국에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합법적인 신분이 된 후에는 동대문에 아시안 식자재와 상품을 파는 수입 마트를 열었다. 2002년쯤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지금처럼 아시안 마트가 각 지역마다 있는 게 아니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수입이 괜찮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나니 각 지역마다 아시안 상품을 파는 매장들이 생겨났다. 결국 다른 사업 아이템을 찾아보다 지난 2007년 여기 수원에 외국인 상대 식당을 열었다.
 

Q. 장사는 어땠나.
처음엔 수원 주변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로 찾았다. 주 고객층이 노동자들이다 보니 퇴근 후 밤늦게 오는 손님들이 많았다. 늦은 시간까지 식당을 운영하는 게 힘들었다. 그런데 운이 따랐다. 2000년대 후반 외국음식 붐이 일어났다. 특히 블로그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특이하거나 생소한 음식을 올리는 경쟁도 벌어졌다. 언론사에서도 취재하려고 많이 왔다. 홍보가 자연스럽게 되다 보니 한국인 손님도 많아졌다. 지금은 운영을 안 하지만 천안역, 강남 신사역, 서강대 앞 등 상권이 큰 곳에 가게를 내기도 했다. 현재는 수원에 1곳, 광주 1곳, 평택 2곳 등 총 4개의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Q. 사업 수완이 좋은 것 같다. 식당을 운영하는 특별한 철칙이 있나.
나는 음식점을 일종의 병원이라고 생각한다. 음식 때문에 건강해질 수도 있고 기운도 차릴 수 있다.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내놓으면 맛있다는 평가는 받을지 몰라도 우리 가게 음식을 자주 먹을 수 있겠나. 자극적이지 않더라도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대접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식당을 운영한다.

Q. 코리안 드림을 이뤘다고 생각하나.
나의 코리안 드림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내 가족들을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데 아직 부족하다. 네팔에 있는 부모님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고 고향의 친지들도 돕고 싶다. 지금도 네팔에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쌀을 보내거나 병원비를 좀 보태주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더 여유를 갖게 되면 더 많이 도와주고 싶다. 그날이 바로 나의 코리안드림이 이뤄지는 날이다.
취재=이세용기자/
사진=노민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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