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사 입구 계단
청계사 입구 계단

경기도 의왕시 청계로 475에 자리 잡은 청계사는 청계산 남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청계산은 높이는 618m로 서쪽에 위치한 관악산과 더불어 서울의 남쪽 방벽을 이루고 있다. 청계사는 고려 말 이색의 시에 ‘청룡산(靑龍山)’으로 기록되었고,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청계산(淸溪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1. 청계사 전경 사진)

靑龍山下古招提 / 청룡산 아래의 오래된 절집
氷雪斷崖臨野谿 / 빙설 쌓인 벼랑이 들과 시내 임했네
端坐南窓讀周易 / 남창에 단정히 앉아 《주역》을 읽는데
鍾聲初動欲鷄棲 / 종소리 한 번 울리니 해 저물 때라
- 이색 -
淸溪寺. 在淸溪山. 有李穀所撰. 平壤府院君趙仁䂓祠堂.
청계사(淸溪寺)는 청계산에 있고, 이곡(李穀)이 지은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인규(趙仁規)의 사당기(祠堂記)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8권 中

조선 영·정조대에 제작된 다양한 군현지도책에는 대부분 청계산(淸溪山)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청계산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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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동여지도 내 의왕지역 청계산)

서울 근교에 위치해 있고 교통이 편리해 비교적 접근성이 좋은 청계산은 등산객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또한 맑은숲공원이 등산로와 연결되어 있어 산책하듯이 천천히 걷다보면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청계사를 방문할 수 있다.

청계산에 위치한 청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통일신라시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제작 년대는 알 수 없다. 청계사로 들어가는 입구 바로 아래에는 "우담바라 핀 청계사"라고 새겨진 큼지막한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옆으로 난 층계에 오르면 청계사 경내로 들어가게 된다. (3. 청계사 입구 계단)

청계사가 지어질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모습과 비슷하게 중창한 시기는 1284년(충렬왕10)으로 조인규가 막대한 사재(私財)를 투입하여 중창하고 자신의 원찰(願刹)로 삼았던 때이다. 이때부터 이 절에는 100명이 넘는 수도승이 상주하였고, 자손들이 조인규의 사당을 짓고 대대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조인규(趙仁規, 1237~1308)는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거진(去塵)이다. 평양부(平壤府) 상원(祥原)의 미미한 가문 출생이었다고 한다.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 몽고어 통역관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존재로 부상하였다. 조인규는 이때 몽고어 통역관으로 뽑힌 뒤 훌륭한 몽고어 실력을 바탕으로 1269년(원종10) 세자 왕심(王諶: 훗날 충렬왕)이 원나라에 입조할 때 수행하여 그와 친분을 만들었다. 그 후로 조인규는 요직을 역임하며 몇 차례나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정치적으로 입지를 다졌다. 1292년 그의 딸이 충선왕비로 간택되면서 왕의 장인이 되어 명실상부 권력의 정상에 서게 되었다. 이렇듯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조인규가 얼마나 불교에 심취해 있었는지는 다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尤篤於釋敎。刱淸溪佛寺。爲上祝釐。金書妙典。墨印海藏。繪塐梵像。不可勝紀。

특히 불교 독실하게 믿어 청계불사(淸溪佛寺)를 창건하고, 임금을 위하여 복을 축원할 때, 묘전(妙典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황금으로 쓰고 해장(海藏 : 대장경(大藏經))을 먹으로 찍어내는가 하면 불상을 그림으로 그리는 등 이러한 일들이 이루 다 기록하지 못을 지경이었다.

- 조정숙공사당기(趙貞肅公祠堂記) 中 -

조선의 건국이후 1407년(태종7) 12월에 청계사는 천태종의 자복사(資福寺)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하여 지정된 사찰로 지정되었다.

1503년(연산군9) 연산군이 도성 내의 사찰에 대한 폐쇄령을 내렸을 때 이 절은 봉은사(奉恩寺)를 대신하여 선종본찰(禪宗本刹)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689년(숙종15) 3월에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을 때 승려 성희(性熙)가 중건하며 그 내력을 정리하여 청계사사적기비(淸溪寺事蹟碑)를 세웠다.

1761년(영조37) 정조가 동궁으로 있을 때 이 절에 원당을 설치한 뒤 밤나무 3,000주를 심었고, 1789년(정조13)에는 사도세자의 원찰로 지정되어 원감(園監)을 두고 관리하였다.

1876년(고종13) 3월 26일에 화재로 수십 칸의 건물이 소실되자 4년 후인 1879년에 승려 음곡(陰谷)이 중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종료 탄압정책으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여 오다가 1955년 비구니 아연(娥演)이 주지로 취임한 뒤 중창을 시작하였고, 월덕(月德)·탄성(呑星)·월탄(月誕) 등이 불사를 이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83년 9월 청계사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삼성각·산신각·종각·수각·지장전 등 10여 채의 건물이 있다.(4. 청계사 극락보전 사진)

청계사는 역사가 오래된 만큼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그 중 청계사 동종(銅鍾)은 보물 제 11-7호로 1702년(숙종27)에 사인비구(思印比丘)가 참여하여 제작하였다.(5. 동종 사진) 종의 높이는 115cm, 입지름 71cm, 무게가 700근이다. 종의 꼭대기에는 두 마리 용의 머리를 연결하여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쌍용뉴(雙龍鈕)가 있다. 상대(上帶)에는 연화당초문을, 하대(下帶)에는 보상화문을 새긴 띠가 둘러져 있다. 상대와 약간의 간격을 두고 9개의 돌기(乳頭)가 있는 네모난 유곽(乳廓) 4개가 사방에 배치되어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연꽃 가지를 손에 쥔 채 구름 위에 서 있는 보살입상 4기가 있다. 종의 허리에는 2줄의 굵은 선이 둘러져 있으며 그 아래로 제작자, 제작시기, 종의 제작에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 등을 새긴 명문이 있다. (5. 청계사 동종)

다음으로 살펴볼 문화재는 신중도(神衆圖)이다. 신중도는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을 그린 불화로 조선후기에 가장 많이 제작되었던 불화 중 하나이다. 청계사 신중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극락보전의 오른쪽 벽에 걸려있다. 구도를 살펴보면 화폭을 크게 3단으로 구분하여 상단에는 범석천과 제석천을 중심으로 천녀의 모습을 한 12위의 신중을 배치하였다. 중단과 하단에 걸쳐 가운데 부분에 위태천을 배치하였으며 중단에는 홀을 들고 있는 문관 모습의 신중 10위, 하단에는 무기를 들고 있는 무관 모습의 신중 8위를 그려 넣었다. 화기(畵記)를 살펴보면 왕생극락, 소원 성취 등의 목적으로 도광이십사년 갑진 시월일(道光二十四年 甲辰 十月日, 1844년 10월)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화기에는 證明比丘(불화도상을 이치에 맞게 그렸는지 감독), 別座比丘(불사의 음식이나 취사를 감독), 化主比丘(사찰재정관리) 등 각 분야별 감독 스님들의 이름과 불화를 그린 금어비구(金魚比丘) 중봉당 세호(中峰堂 勢晧), 계심(戒心), 지선(智宣), 상규(尙奎) 의 이름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6.~ 6-2 신중도 및 화기)

청계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목판은 현재 총 14종 465판이 남아있으며, 이 중 14종 462판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1622년(광해군 14)에 판각한 『묘법연화경』부터 1902년(고종39)에 판각한 『수구대명왕대다라니』까지 모두 청계사에서 판각하였다. 목판의 구성은 주로 불교 문헌과 관련된 것이지만 『천자문』같은 교재용 책판도 포함되어 있다. 목판은 기존에 보관 중이던 전각의 모처에서 최근에 지은 수장고로 옮겨졌다. (7. 목판 사진)

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
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

청계사 경내에는 부도와 비석들은 한 곳에 모아놓은 장소가 있는데 그 비석들 중 청계사의 연혁에 대해 기록해 놓은 비석이 2기 있다. 하나는 조정숙공사당기비(趙貞肅公祠堂記碑)이고 나머지 하나는 1689년에 제작된 청계사 사적기비(淸溪寺事蹟記碑)이다. 조정숙공 사당기비를 먼저 살펴보면 비석 받침은 3단이고, 비신 위쪽의 양끝 모서리를 줄인 형식으로 비신이 한 때 절단되어 접합시켜 놓은 상태이다. 현재 비석의 글씨는 거의 마모되어 ‘조정숙공사당기(趙貞肅公祠堂記)’라는 비액 글씨만 확인할 수 있다. 다행히 비문을 지은 이곡(1298~1351)의 문집 『가정집(稼亭集)』권3에 비문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어 조인규가 어떤 이유로 청계사 불사에 참여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8. 조정숙공사당기비)

<청계사 사적기비>는 청계사의 연혁을 기록한 비석으로 1689년(숙종15)에 제작되었다. 형태는 방부개석 양식으로 지붕 모양을 단순화해서 개석으로 얹었으며, 받침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이 사적기비는 조인규의 11대손인 조운(趙橒)이 글을 짓고, 윤창적(尹昌績)이 글씨를 썼다. 청계사의 창건과정과 조선시대 이후 청계사의 재정적 사정을 알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1689년 3월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6월에 중건했던 사정들이 기록되어 있다. (9. 사적기비)

청계사는 이렇듯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역사가 오래된 고찰이다. 그러나 몇 번의 화재로 중창을 거듭하였고 청계산 맑은숲공원의 개발 등으로 등산로가 정비되고 주차장과 도로가 생기면서 누구나 방문하기에 편한 절이 되었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가을 초입, 이번 주말에 편안한 마음으로 청계사를 산책하는 것은 어떨까.

서영진 의왕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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