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림사 전경
봉림사 전경

봉림사(鳳林寺)는 화성시 남양읍에 있는 나지막한 비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남양(南陽)은 이른 시기 백제에 속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기록이 없어 당시의 명칭은 알 수 없다. 이후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가 진흥왕 때 신라의 지배권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 남양은 지금의 화성을 대표하는 중심 지역이었다.

현재 화성 서부에 해당하는 고대의 남양 지역은 삼국의 각축지였다. 또한 화성 서신면에는 삼국시대 이후 중국으로 향하는 중요한 교두보였던 당항성으로 비정된 당성(사적)이 있다.

이렇듯 봉림사가 위치한 남양 지역은 삼국이 번갈아 장악했던 곳이며 서해로 가는 길목으로써의 지정학적 의미를 지닌다.

비봉산 봉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이다. 사찰의 이름은 창건 당시 궁에서 기르던 새가 절 근처의 숲으로 날아들었다는 데서 비롯했다고 한다. 산의 이름이 ‘비봉(飛鳳)’인 것도 사찰 이름과 연관 있을 터이다.

봉림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 고구려, 백제의 잦은 침략을 부처님의 가피로 물리치고자 창건하였다 전한다. 지금은 창건 당시의 흔적을 찾을 만한 유적은 없으나, 고대에 이 지역이 번갈아 가며 삼국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볼 때 봉림사 역사의 장구함을 짐작해 볼 만 하다.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사찰의 연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고, 조선시대에 절을 수리한 내용이 전해진다. 1621년(광해군 13)에 안모·자현 스님이 화주(化主)를 맡아 극락전·망양루·봉향각·범종각 등을 고쳐 지었고, 1708년(숙종 34)에 다시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884년(고종 21) 무렵에도 중건이 있었으며, 최근에 삼성각을 건립하고 요사를 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봉림사에 가기 위해서는 남양 뉴타운 방향의 322번 지방도로에서 사찰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양쪽으로 늘어선 공장들을 지나면 일주문과 사천왕상이 있는 천왕문에 다다른다.

주차 공간이 일주문과 천왕문의 안쪽에 마련돼 있어 차로 가면 두 문을 지나치기 쉽다. 주차장 뒤로 높다란 범종루가 보이고, 누각 아래로 난 계단을 통해 누하진입(樓下進入)으로 사찰 마당에 들어선다. 높은 축대 위에 전각들을 배치하여 범종루 옆에 서면 남양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극락전
극락전

주불전인 극락전은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모신 법당이다. 아미타여래는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이기에 극락전은 보통 서향을 하고 있다.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 불상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오른쪽에 지장보살좌상과 왼쪽에 관세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하고 있다. 원래는 아미타여래 단독상이었으나 지장보살상과 관세음보살상을 근래에 조성하여 삼존상을 봉안하였다.

아미타여래상은 단아하면서도 엄숙한 표정으로 반쯤 감은 눈은 아래를 보고 있다. 그리고 오른손은 가슴 근처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로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하고 있다. 양어깨를 감싼 옷을 입은 불상의 체구는 크고 상체가 다소 앞으로 숙인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사실적인 옷 주름과 안정적인 신체 비례 등이 잘 표현되었으며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뛰어난 불상이다.

1978년에 개금(改金)할 때 목조아미타여래상 안에서 경전을 비롯한 사리와 사리병, 곡물, 구슬, 직물류 등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불상은 처음 조성할 때나 다시 금칠할 때 내부에 서책 등의 전적류와 경전에 근거한 공양물 등을 넣는데 이를 ‘복장(腹藏)’이라 한다. 복장유물에서는 발원문과 시주자 이름이 발견되기도 하여 불상의 조성 근거와 제작 시기를 짐작하는 데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리고 개금 때 발견된 ‘조성개금기(造成改金記)’에는 지정 22년인 1362년(공민왕 11)과 만력 11년인 1583년(선조 16)에 개금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조성개금기>
"至正二十二年 壬寅三月日 堂主無量壽如來改金請緣勤軸"
(지정이십이년 임인삼월일 당주무량수여래개금청연근축)

<개금기>
"萬曆十一年 癸未八月二十八日鳳林寺堂主無量壽 改金請緣勤軸"
(만력십일년 계미팔월이십팔일봉림사당주무량수 개금청연근축)

이는 적어도 1362년 전에는 이 불상이 조성되었음을 추정하게 하는 중요한 내용이다. 그리고 봉림사의 불상을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라고 칭하고 있어 봉림사의 부처님이 아미타여래의 다른 이름인 무량수여래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금강경 사진=불교중앙박물관 '효성으로 나툰 불심의 세계' 도록
금강경 사진=불교중앙박물관 '효성으로 나툰 불심의 세계' 도록

복장유물 중에서 전적류는 총 8종 17점으로 ‘금강반야바라밀경’·‘대방광불화엄경’·‘묘법연화경’ 등 다수의 불경이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은 금강경으로 약칭되는 금강반야바라밀경으로 고려 충선왕 3년인 1311년에 판각한 것이며 인출기(印出記)에 충숙왕 복위 8년인 1339년에 진성군(晉城君) 강금강(姜金剛)이 시주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세밀하게 그려진 변상도를 갖춘 금강경은 몸에 지니기 위해 만들어진 수진본(袖珍本)이다. 수진본은 소매 속에 넣어 지니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크기의 경전을 말한다. 사용 흔적이 있어 실제 당시 사람들이 옷 속에 품고 다니며 사용하던 것을 복장에 넣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전적류는 불상과 별도로 일괄이 보물로 지정되었고,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그리고 직물류로는 무늬가 있는 직물과 함께 목화·솜고치 등의 섬유 원료가 나왔는데, 섬유 원료는 조선 후기의 복장유물에서 발견되는 사례가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유물은 고려와 조선의 불교 신앙은 물론 경전 및 서지학 등의 당시 문화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의미가 깊다.

치성광여래도
치성광여래도

또한 봉림사에는 조선시대의 불화인 ‘아미타후불탱화(1884년 조성)’와 ‘지장탱화’·‘신중탱화’·‘치성광여래도’ 등이 전하고 있다.

이 중 눈여겨 볼만한 것은 삼성각에 봉안된 족자형 불화인 '치성광여래도' 이다. 화면의 중앙에는 북극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가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둥근 대좌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그리고 치성광여래의 좌우에는 보관에 붉은 해를 갖춘 일광보살과 흰 달을 갖춘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화기에 따르면 1887년에 수원 승류산 봉래암(蓬萊庵)에서 제작하고 봉림사에 이운하여 봉안한 것이다. 화승(畵僧)인 축연이 주도하여 그림을 그리고 긍법이 동참하였으며 철유가 증명(證明: 의식이 원만히 성취되었음을 인정함)을 맡았다. 축연과 철유는 근대기에 이름이 높았던 화승인데, 특히 축연은 전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한편 비봉산 봉림사의 풍광을 묘사한 홍섬(1504~1585)과 홍한주(1798~1868)의 글이 전하고 있다. 남양 출신인 홍섬의 글에는 봉림사의 종소리와 승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어 그가 살았던 16세기에는 사찰이 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관찬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7세기 사찬지리지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도 봉림사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19세기 인물인 홍한주의 시인‘남양봉림사(南陽鳳林寺)’에서는 스님은 없고 절이 폐허가 되었다는 표현이 있어 1708년과 1884년의 중건 사이에 사찰이 잠시 쇠락하였던 듯하다.

그 옛날 비봉산은 조선시대에 많은 문인이 찾아 신선이 사는 산과 같다 하고, 봉림사의 종소리는 시종 맑다 하며 시제로 삼았으니 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짐작할 만하다.

이번 가을에 새들도 쉬어 간다는 비봉산 봉림사의 누각 위에 올라 고즈넉한 사찰의 풍광을 느껴보면 좋겠다.

이재연 화성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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