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튀르키예 군인들은 전쟁으로 상처 입은 아이들의 부모를 자처하며 ‘수원앙카라학원’을 세웠다. 한국전, 그 참혹했던 전쟁 속에도 튀르키예 군인들은 수원 앙카라 학원에서 이 땅의 아이들을 보호하고 가르쳤다.

 70년이 지난 지금 점차 희미해지는 앙카라학원의 의의를 재조명하기 위해 중부일보는 8월 13일부터 21일까지 튀르키예 이스탄불·앙카라 참전용사회, 튀르키예 국방부 군사역사기록보관소, 주 튀르키예 한국대사관, 적신월사(적십자) 등을 방문해 취재했다. 

향후 중부일보는 10회에 걸쳐 ‘월드리포트 앙카라 학원의 기억과 기록’을 연재하며 참전 용사들의 생생한 증언과 현지 기록을 통해 한국과 튀르키예 우호관계의 원천을 재확인한다.  


앙카라학원 밴드부. 사진=터키 한국전 참전군인협회
앙카라학원 밴드부. 사진=터키 한국전 참전군인협회

<1> 앙카라학원을 아시나요?

고아 극빈아 위해 1951년7월7일 설립
병사들 학원앞 길 정비 놀이기구 제작
1953년 결성한 밴드부, 위문공연 다녀
최태영 등 다수의 교사들 500여명 교육

앙카라학원은 1951년 7월 7일 한국전에 참전한 튀르키예 군인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아동 청소년 보호시설이자 교육시설이다.

처음에는 튀르키예의 젊은 군인들이 전선에 홀로 남겨진 아이들을 안고서 막사로 돌아와 하나 둘 보호하던 것이 시작이었다.

각 부대마다 아이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 전투가 어려운 지경에 달했고 병사들 개인의 임시적인 보호도 힘들어진 상황에 이르자 바하틴 상사 등이 그들의 여단장인 타신 야지즈 준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수용할 건물을 요청했다.

야지즈 준장은 병사들의 제의를 받아들여 아이들을 수용할 건물과 막사를 배정했다.

공식적으로 기관을 설립해 아이들을 거두기로 한 것이다.
 

기숙사 목욕탕에 논밭 과수원 축사까지
3년뒤 시설 대폭 확장해 자립기반 마련
1979년4월10일 돌연 폐쇄 이유 몰라

◇세심한 튀르키예 남자들=앙카라학원은 튀르키예군 병사들의 모금과 튀르키예 정부, 튀르키예 적신월사(적십자), 튀르키예 민간인들의 지원으로 운영했다.

튀르키예 군인들은 앙카라학원을 설립한 것으로 책임을 끝낸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더욱 잘 돌보기 위해 앙카라학원을 설립했다.

이는 앙카라학원에서 자랐던 오수업 앙카라형제회(앙카라학원 원아들의 모임) 회장과 회원들의 기억에서도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오수업 회장은 1945년생으로 1951년 6살 나이 전쟁고아로 앙카라학원에 입소했다.

그는 "앙카라학원 앞 길이 흙길이라 땅이 많이 질었는데 이것을 안 튀르키예 군인들이 돌길을 깔아주었다"며 "인근의 서호천의 돌을 가져다 일일이 깨어서 돌길을 만들었고 덕분에 자동차가 앙카라학원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돌이켰다.

그는 아이들을 위해 튀르키예 군인들이 쉬는 날에 앙카라학원을 찾아와 놀이기구를 만들어 준 것을 기억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는다.


당시 튀르키예 군인들은 남자숙소 앞에는 튀르키예의 놀이기구를 직접 만들어 줬다. 서로 마주보고 앉으면 옆에서 놀이기구를 돌려주는 방식으로 물레방아, 풍차형태를 띈다고 했다. 오 회장의 증언을 미루어 짐작하자면 일종의 미니 관람차로 추정된다.

오 회장은 "그 더운 날에 아이들을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놀이기구를 만들어 준 것이 기억난다"며 "너무 고맙게 생각한다"고 다시금 고마움을 전했다.

1953년(추정)에는 앙카라학원 학생들을 위해 튀르키예 군악대에서 사용하던 악기를 기증해 밴드부를 결성했다.

앙카라학원에 딸린 과수원. 사진= 오수업 앙카라형제회 회장
앙카라학원에 딸린 과수원. 사진= 오수업 앙카라형제회 회장

또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삼일중학교, 매산초등학교 교사가 지원했다.

앙카라학원의 밴드부는 때때로 튀르키예 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했으며, 여러 정부행사에도 초청돼 공연을 펼쳤다.

특히 앙카라학원 밴드부 출신 김종기는 1963년 워커힐호텔 개관을 기념해 내한한 루이 암스트롱과 협연을 펼칠 정도의 실력자였다.

튀르키예 군인들의 세심한 배려는 이뿐 아니다.

튀르키예 군인들은 일본으로 휴가를 떠나면 아이들을 위한 물품을 구매해 들어왔는데 대표적인 물품이 교복이다. 당시 처참했던 한국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앙카라학원 학생들에게는 큰 자부심이 됐다. 앙카라형제회 회원들은 과거를 회상하거나 과거사진에서 다른 아동들과 구분 할 때 일본의 교복인 세일러복 착용 여부를 기준으로 삼을 정도다.

현재 남은 앙카라학원 여자숙소 수원시 서둔동 45-9. 사진=아시아문화연구원
현재 남은 앙카라학원 여자숙소 수원시 서둔동 45-9. 사진=아시아문화연구원

◇고아원 아닙니다. 학교입니다=1951년 7월7일 설립 이후 약 3년이 지나고 1954년 10월 29일 앙카라학원을 크게 확장했다.

튀르키예는 튀르키예 공화국의 기념일을 기해 앙카라학원에 필요한 시설을 신축하고 약 1만6천500㎡(5천평)의 토지를 구입해 앙카라학원의 자립 기반으로 제공했다.

이렇게 조성된 시설은 남자·여자 기숙사, 영아원, 유아원, 원장사택, 목욕탕, 화장실, 식당, 창고, 재봉실 등을 갖췄고 밭과 논, 과수원, 축사(소, 닭, 돼지) 등도 같이 있어 아이들을 위해 활용됐다.

이 같이 큰 규모의 시설과 부지를 제공한 것은 튀르키예군이 어느 날 철군을 하더라도 학교가 자립해 살아갈 수 있도록 방편을 마련한 것이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의하면 1973년 앙카라학원의 재산은 대지, 논, 밭, 과수원 등 4만2천㎡까지 늘어난 것이 확인된다.

원장을 비롯해 교사와 보모와 관리인도 있어 나름 체계적으로 아이들을 보호했다.

다만, 시대 사정 상 원아들은 때때로 농사일을 도와야 했으며 고학년은 저학년을, 저학년은 유아들을 보육하고 가르치는 것에 손을 보탰다.

하지만 단지 고아원으로 머물지는 않았다.

기존에 고아원으로 알려졌던 것과 달리 앙카라학원에서는 고아가 아닌 피난아동, 극빈가정의 아동들도 보호하고 교육했다. 입교한 아이들은 앙카라학원에서 초등학교 4학년 과정까지 교육을 마치고 인근 초중등학교로 진학해 배움을 이어갔다.
 

이에 대해 오수업 회장은 "내가 입교할 51년 6월에 이미 텐트를 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며 앙카라 학원에서 교육이 이뤄졌음을 증언한다.

또 앙카라 학원 설립 당시 야지즈 장군은 한국정부에 아이들의 교육을 수행할 교사를 요청했고 한국정부는 초대 원장인 최태영 교사를 임명했다.

최태영 원장 이외에도 최대 10명의 교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숫자는 확인되지 않는 다. 교사들 역시 아이들을 위해 무급으로 가르치며 희생했다.

또 다수의 앙카라형제회 회원들의 증언에서도 고아들만을 위한 시설이 아님이 확인된다. 다만 개인신상 등의 문제로 익명을 요구했다.

한 회원의 경우 엄마가 직접 자신을 앙카라학원에 데려다 줬고 자신 역시 매일 죽만 먹는 것이 힘들어서 먹고 입는 것이 훨씬 나은 앙카라학원을 선택했다고 증언했다.

또 앙카라학원의 생활에 만족해 자신의 조카도 앙카라 학원으로 데려왔다.

세라복을 입은 앙카라학원 원아들. 뒷줄 왼쪽 세번째는 지동익 2대 원장, 그 옆의 군인은 5연대장 메테장군 1960년대 추정. 사진=터키 한국전 참전군인협회
세라복을 입은 앙카라학원 원아들. 뒷줄 왼쪽 세번째는 지동익 2대 원장, 그 옆의 군인은 5연대장 메테장군 1960년대 추정. 사진=터키 한국전 참전군인협회

황해도 황주에서 피난 온 한 회원은 "피난을 와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하지만 공부할 수 있는 곳은 앙카라학원 뿐이었고, 부모님이 계셨지만 앙카라학원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처럼 자의로 입교한 회원들도 있지만 여러운 경제형편으로 부모가 떠밀듯 맡긴 경우도 확인된다.

어려운 시절, 안타까운 사연을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원아들은 앙카라학원 생활에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회원은 "남들은 밥 굶을 때 C-ration을 먹고 살았다. 우린 잘 먹고 잘 살았다"며 회상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기사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 1951년 7월 7일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면 앙카라학원에서 보호 중인 고아(28명)와 피난아동(65명)을 구분해서 수를 셈하고 있고 또 이들을 공부시키고 있다고 기록했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앙카라학원을 설립한 튀르키예 군인들은 1966년 잔류중대를 끝으로 한국을 떠났다.

튀르키예 군인들이 떠나고 앙카라학원은 이후 1979년 4월 10일 문을 닫을 때까지 약 400~500명의 아이들을 길러냈다.

1974년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고 용인에도 시설을 운영하는 등 지속될 것처럼 보였지만 안타깝게 앙카라학원은 돌연 폐쇄했다.

이와 관련해 경기도, 수원시에서 이전 등기 등을 요구하는 문서는 확인되지만 왜 앙카라학원이 문을 닫았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중부일보 취재팀=강경묵 문화부장·김용국 박사·용인외국인지원센터장·공익법인 아시아문화연구원장·안형철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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