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흥국사 전경
고양 흥국사 전경

◇ 상서로운 기운이 모여 도량을 열고, 왕실과의 인연으로 가람을 일신

북한산의 서쪽, 쭉 뻗은 줄기를 따라가면 고양시 동쪽에 자리한 노고산(老姑山) 자락이 이어지고, 이 산의 서남쪽에는 흥국사(興國寺)가 자리한다. 흥국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북한산과 도봉산의 산세가 훤히 드러나는데, 특히 삼성각 앞쪽에서는 사시사철 변화하는 북한산의 풍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흥국사는 661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흥서암(興瑞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아미타불복장연기문(阿彌陀佛腹藏緣起文)에는 원효대사가 북한산 원효암에서 수행하던 어느 날 서북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산을 내려와 이곳에 이르렀는데, 서기(瑞氣)를 발하고 있는 석조 약사불을 보고 인연이 있는 도량이라 생각하여 전각에 약사불상을 모시고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이라 앞으로 많은 성인이 배출될 것이다.’라고 하여 절의 이름을 흥서암으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경내와 이 일대에 신라시대 창건 설, 고려시대 사세(寺勢) 유지를 뒷받침할 만한 유물이나 문헌은 전하지 않아 창건 이후 연혁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찰의 이름이 지금과 같이 흥국사로 쓰인 것은 조선시대 후기부터이다. 절이 위치한 노고산은 한글로 풀어쓰면 할미산이다. 영조 임금이 그의 생모 숙빈 최씨의 원소(園所)인 소령원(昭寧園) 거둥하는 길에 이 절에 들러 노고산을 한미산(漢美山)으로 바꾸고, 절의 이름도 흥서암에서 흥국사로 고쳤다고 한다. 따라서 실질적인 흥국사의 창건은 18세기 말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양 흥국사 영산회상도, 179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고양 흥국사 영산회상도, 179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영조 임금이 한미산으로 행차했을 때 이 사찰에 들린 것을 계기로 왕실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던 듯 현재 사찰에는 1792년 조성된 영산회상도 1점이 전해진다. 이 불화의 화기(畫記)에는 불화를 조성하면서 아미타불상을 개금하고, 더불어 약사불상에도 분(粉)을 칠하여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와 함께 시주 명단에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6), 상궁 김씨(尙宮 金氏), 그리고 수진궁 차지(壽進宮 次知) 등 왕실과 관련 있는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18세기 말엽 왕실과의 인연은 가람의 일신으로 이어졌다. 1854년 황해도 장련군 학서사에 있는 범종과 삼존불상, 칠성목각탱을 흥국사로 이안해 왔고, 1867년 가을에는 약사전이 중건되었다. 1876년 여름에는 화주 뇌허(雷虛)스님이 칠성전을 세웠고, 1902년에는 화주 뇌응(雷應)스님이 나한전과 산신각을 건립하였다. 이후 1915년 여름과 1917년에 건물 4동이 지어지는 등 20세기 전반에 현재 흥국사의 가람이 갖춰졌다. 

 

고양 흥국사 영산회상도 화기 부분
고양 흥국사 영산회상도 화기 부분

◇구한말,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신앙결사인 만일염불회 조직

흥국사는 주불전인 약사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나한전, 왼쪽에 명부전, 그 앞쪽에 대방(大房)이 위치하는 ‘ㅁ’ 자형 전각의 배치를 구성한다. 대방은 주불전 앞에 위치해 있어 약사전 앞에서 보았을 때는 전각의 모습을 취하고 있으나, 전면부인 반대편에서 보면 누각의 형태를 보인다. 방향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이 전각의 기능 역시 특이하다. 즉 약사전 앞쪽으로 대방에 들어가면 예배의 공간이고, 그 공간에서 들어오는 반대편 문으로 나가면 누각이 나온다. 또, 누각을 지나는 복도 끝에는 스님이 거처하는 방으로 연결되는데, 이렇게 ‘ㄱ’ 자형 평면 전면의 돌출된 부분에 누각을 배치한 독특한 건물을 흥국사에서 ‘미타전(彌陀殿)’이라 부른다. 

고양 흥국사 대방(=미타전) 전면 누각형태, 1904년 추정, 국가 등록문화재
고양 흥국사 대방(=미타전) 전면 누각형태, 1904년 추정, 국가 등록문화재

흥국사 미타전은 법당과 마루 그리고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다른 사찰의 경우는 불당-승당-부엌, 휴식-접객의 기능이 복합된 건물 자체가 하나의 작은 사찰과도 같다. ‘ㄱ’자형의 구조는 원래 19세기부터 궁궐과 주택 건축에서 유행한 건축 형식이었다. 원당 사찰(願堂 寺刹)은 왕실의 정치적ㆍ재정적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궁인(宮人)들에게 익숙한 환경인 궁궐 또는 주택 건축을 적극적으로 응용하였다. 
1904년부터 시작된 흥국사의 만일염불회는 미타전에서 개최되었다. 주전각 앞에 기존의 공간을 25칸으로 넓게 터 증축함으로써 만일염불회가 개최될 공간을 마련하고, 그 안에는 아미타불상과 극락의 세계를 묘사한 극락구품도를 봉안하였다. 당시 불교계에서 ‘염불(念佛)’은 대단한 열풍을 일으켰다. 염불의 수행방법은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 아미타불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큰 소리로 함께 ‘칭명염불(稱名念佛)’하는 것이다.

염불이 대중적으로 확산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 1520-1604)에 의해서였다. 그는 마음으로부터 아미타불을 생각하며 염불하는 것은 팔십억 겁의 죄를 소멸하고 수승한 공덕을 성취한다고 하여 염불수행의 행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17세기와 18세기를 걸쳐 염불계(念佛契)의 형태로 유행하였고, 19세기에 이르면 만일이라는 기간을 산정하여 염불하는 이른바 ‘만일염불결사(萬日念佛結社)’로 확대되었다.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 국립중앙박물관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 국립중앙박물관

만일동안의 염불은 신앙이 근간이 되어야 하겠지만 경제적인 비용도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염불당을 짓고 조직을 구성하여 염불회에 소요되는 비용을 모으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1908년 상궁 오씨(尙宮 吳氏)와 신도 원학주(元鶴柱)가 중흥사의 금고를 사서 사찰에 헌납하였고, 1911년 회명(晦明)스님이 이 결사의 성취를 위해 양양의 논 80두락을 바쳤다. 같은 해 서울의 박신심월(朴信心月)은 불량답(佛糧畓)을 헌납하여 만일염불회 기간 동안 시주를 했다. 1913년 겨울에는 주실 해송(海松)스님과 뇌음, 풍곡스님이 협력하여 국유림 약 26정(町)을 임대받아 운영하였고, 해송스님은 별도로 은사 완선(琓船)스님이 입적할 때 물려준 논ㆍ밭을 팔아가며, 이 결사의 완성을 위해 여러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조선의 마지막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의 염원이 담긴 고양 흥국사

불사  이 신앙결사의 궁긍적인 목적은 조선 제26대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였던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1911)의 아들 영친왕(英親王, 1897-1970)을 위함이었다. 그녀는 만일염불회가 결성되기 이전부터 흥국사를 후원했던 왕실의 인물 중에 한 명으로 조선시대 전기 왕실의 여성으로 수많은 불사(佛事)를 후원했던 문정왕후(文定王后 尹氏, 1501-1565)와 버금가는 조선시대 후기 불교미술의 후원자였다. 

1902년 흥국사에서는 그녀의 후원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춘 불화승(佛畵僧)들이 참여해 6미터가 넘는 대형의 괘불(掛佛)을 그려 봉안하였다. 이 괘불은 오색 구름이 창연하는 가운데 화면 중앙에 미소를 머금은 무량수불이 서 있으며, 그 옆을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란꽃과 연꽃을 들고 있다. 두 보살의 허리쯤에는 부처님의 두 제자인 아난과 가섭이 조용히 합장하고 있고, 화면 아래쪽에는 구름으로 둘러싸인 원형 안에 동자형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연꽃과 여의를 들고 있다. 부처의 왼손은 가슴부근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직접 중생을 인도하는 모습을 짓고 있다.
이 불화가 조성된 1902년은 그녀가 황귀비(皇貴妃)로 책봉되어 내명부 뿐 아니라 왕실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점한 시점이었다. 그녀의 아들인 영친왕은 비록 서자였지만 당시 그녀의 정치력으로 볼 때 왕위승계에 대한 바람은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와 함께 고종의 건강과 당시 황태자 전하 부부였던 훗날의 순종부부의 안녕을 염원하면서도 자신과 영친왕을 위하여 이 불화를 발원하고 봉안한 것이다.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 1929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62호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 1929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62호

1904년 시작된 흥국사의 만일염불회는 28년 동안 이어졌고, 25년이 경과된 1929년 만일의 회향을 3년 앞두고 이 만일회를 이끈 해송스님은 결사를 기념하는 만일회비(萬日會碑)를 사찰 입구에 건립하였다. 2m 높이의 검은 대리석비가 제막되던 날 왕실의 인사 가운데 혼자 살아남은 장상궁(張尙宮)은 비석을 부여안고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이 비는 현재까지 전해져 20세기 불교사에 만일염불결사를 증언하고 역사의 아픈 뒤안길을 전해준다. 

이 이야기와 다르게 당시 많은 사람들이 만일 동안 아미타불을 염불했던 배경에는 시대적 요구가 불교의 신앙과 맞물렸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즉, 구한말인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자주적 근대화가 좌절되고 강대국의 정치적 종속이 심화되는 가운데 국내 정세는 극도로 혼란하였고, 현실에 대한 불안한 심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식처를 찾아 보다 안정된 세상을 꿈꾸게 하였다. 
고양 흥국사는 그 이름에서처럼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찰이다. 20세기 초 근대기로 접어드는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당시 왕실 구성원의 안녕을 기원하고, 일체 중생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무량수불이 있는 극락국(極樂國)에서 만나기를 염원한 수도권의 대표적 도량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김수현 고양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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