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도심지를 감싸 안고 있는 설봉산 자락에 한 사찰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인 이천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된 전통사찰 영월암(映月庵)이다. 지금은 ‘영월암’으로 통칭되고 있으나 조선시대까지는 북악사(北岳寺, 北嶽寺)로, 광복이후엔 잠시 보림사(保林寺)로도 불리었다.

영월암 전경

설봉산에는 영월암 이외에도 여러 사찰과 관련된 흔적도 볼 수 있다. 18세기 중반의 상황을 알 수 있는‘여지도서(輿地圖書)’상권, 이천관내 사찰부분에서는 안흥사(安興寺), 안악사(定岳寺), 안양사(安養寺), 입석사(立石寺), 송령사(松嶺寺)는 모두 폐사되었고, 북악사(北岳寺)는 관부에서 서쪽으로 5리(里)되는 설봉기슭에 있고, 신흥사(新興寺)는 북악(北岳) 아래에 있으며, 약사암(藥師庵)은 신흥사의 동편에 있었다고 전한다.

영월암의 창건과 관련한 연기설화에는 의상대사(625 ~ 702)가 창건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를 입증할만한 명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907년 이천충화사건으로 사찰의 연기까지 모두 소실되어 현재는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다. 오히려 남아있는 유물을 대상으로 마애여래입상(보물 822호)과 신라 말 고려 초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광배로 창건시기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월암 은행나무. 

영월암 초입에는 수령 약 640년의 보호수인 은행나무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 은행나무는 고려 공민왕대 조선의 수도를 정한 무학대사의 스승으로 알려진 나옹대사가 영월암에 머물면서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현재 은행나무가 서 있는 자리 꽂았다고 한다. 스님들과 신도들은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고, 며칠 뒤 나옹대사는 영월암을 떠났는데, 시간이 지나서 지팡이에서 갑자기 싹이 트더니 지금의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영월암의 본당 대웅전은 1914년 총독부령에 의하여 이천경찰서가 이천 관아내에 설치된 후 이천관아가 완전히 해체되고 관아의 누각이 이천향교로 이전되어 풍영루(諷詠樓)로 재건되었다. 그러다가 1948년 향교 앞의 누각이 붕괴되자 그 목부재와 석재 등을 영월암으로 이전하여 대웅전을 중건하기 시작하여 1950년 초파일에 상량낙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천 관아 문루(풍영루)
이천 관아 문루(풍영루)

지난 2016년 이천 영월암(映月庵) 대웅전 해체보수 공사중 상량 장혀에서 상량문(雪峰山 保林寺 重建 上樑文)과 함께 214점의 상량유물이 발견되었다.

상량문은 이천 의병활동이 한창이었던 1907년 일본군이 자행한 ‘이천충화사건(利川衝火事件)’의 참화로 영월암이 전소되어 폐사지경에 이르렀다가 1950년 사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주지 김청일(金晴一)이 중건할 당시 봉안되었다.

상량문뿐 아니라 상량 장혀(기둥과 대들보의 접합을 돕는 구조물)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에는 상평통보, 건륭통보와 조선은행에서 초판 발행한 백원짜리 지폐, 다이쇼(大正)ㆍ쇼와(昭和) 년간에 발행된 일본 동전 등 수십 점의 화폐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은반지를 비롯하여 은수저, 은비녀, 은장도 등 다양한 은장식품과 호박 쌍가락지, 노리개 등 다양한 장식물이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눈에 띄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전쟁 총동원령을 내리고, 여성들도 전쟁에 참여시키기 위해 결성한 친일단체의 애국부인회‘通常愛國婦人會會員’의 회원장이 1점이 포함돼 있다.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해방정국에 이루어진 영월암 대웅전 중수과정에서는 건축양식과 사용된 부재, 그리고 상량문과 상량유물이 당시 영월암과 지역사회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다.

상량유물에서 보듯이 여러 사람들이 개개인의 이름이나 법명 또는 발원내용을 간결하게 적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나아가 모든 중생들의 간절한 소망과 진실한 마음의 원을 담아 부처님의 자비와 원력을 받고자 개개인의 소중한 물건을 대웅전 상량 장혀에 담아 두었던 것과 상량문에 기록된 이천군과 경찰서를 비롯하여 목수, 화주, 법당건축회 등 여러 성원들이 영월암 대웅전 중수에 협조와 지원을 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영월암이 이천지역사회에서의 종교적 활동의 구심점임을 역설하는 것이라 하겠다.

아미타전.
아미타전.

1937년에는 산신각과 누각이 중건되고, 이후 1972년에 중요시설물로 조사되기 이전까지 수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7년에 불교단체등록이 되었으나, 1968년에는 화재로 현재의 아미타전 위치로 보이는 객실건물이라고 하는 것에 화재가 있은 후 철거된다. 이후 1980년대에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이 국가지정문화재가 되면서 사찰의 주변정비가 있었고, 현재와 유사한 모습으로 변화된다.

영월암마애여래입상(보물제822호)
영월암마애여래입상(보물제822호)

1995년에는 경관을 저해하는 건물을 철거하고 종각과 별당은 증개축 되었다. 1998년에는 아미타전이 건립되고, 2005년에는 안심당 뒤편의 2층 요사채가 증축되었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의 아미타전 축소공사와 대웅전 해체보수공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끝으로, 1950년 영월암(당시 보림사) 대웅전 상량문을 인용하면서 당시의 불심을 전한다.

"기술하노라, 서역을 떠난 부처님 도가 길이 멀고 멀지만 석가여래 진리는 먼저 통했고, 북악(설봉산) 봉우리 기이하고 아름다워 이미 영월암이 창건되었다. 오백나한의 교화와 삼천법계의 청정함은 모두 옛일이로다.

다행이로다. 진시황제의 무도한 분서갱유는 옛날 일이라 미치지 못하였고, 운명이로다. 왜병이 오래도록 노략질하여 (이천을) 불태워 마침내 그 때를 당하여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원숭이들이 이미 머문 세월이 40년이요 오직 저들이 와서 적막하기 일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주지 김청일과 군민이 일심으로 함께 힘을 도와 견디어 내었다.

서리 비둘기도 입으로 재물을 물어오고 방어 물고기도 작은 힘을 보탰다. 법당을 다시 세우니 산 이름은 옛날부터 설봉산이요, 그 시기는 경인년이니 길하도다.

영월암석조광배(향토유적 제3호)
영월암석조광배(향토유적 제3호)

꽃과 버들 늦봄 맞으니 날씨는 따뜻하고 바람은 온화하며, 연기와 이슬 깊은 골짜기 이 땅이 깨끗하여 부처님이 영험 하네. 그리하여 한마음 함께 힘쓰니 어찌 나무와 돌을 갖춤에 어렵다 하랴. 이에 힘쓰고 다스려 모든 전각이 이루어졌도다. 해를 이어 경영함에 어찌 미비한 느낌이 있으리오, 특별한 땅에 중건하니 어찌 정녕 축하함이 없으리오.

축하하여 가로되, 힘을 보태어 대들보를 들어 올려 공경스레 짧은 노래 말하노라.

어영차 대들보 동쪽으로 던지니 복하개울 진리동네 길이 서로 통하고, 이천읍네 등불 밝혀 바라보니 가이 없는 모습이요, 집집마다 불빛 밝혀 비추니 옛 풍광이로구나.

어영차 대들보 서쪽으로 던지니 설봉산 마루에 무성한 구름 낮게 깔려 있고 찬란한 별빛 솔숲에 돌아드니 염불 소리에 새가 차례대로 둥지에 내려앉네.

어영차 대들보 남쪽으로 던지니 남산 바위 높이 솟아 푸르름이 쪽빛같고 이슬비 동풍불어 발처럼 펼쳐 내리며 쌍쌍 제비는 지지배배 축하하네.

어영차 대들보 북쪽으로 던지니 원적산 산빛이 오래된 이곳을 비추고 염불하는 노래 소리에 백발 노승이 인(仁)을 닦고 덕(德)을 베풀어 그 즐거움을 함께하네.

어영차 대들보 위쪽으로 던지니 교화의 날 오래도록 펼치니 은혜의 비 흠뻑 적셔지고, 이로부터 절 가운데 부처님 몸 나툼이 더욱 빛나며 빛을 향한 꽃과 나무 봄을 맞아 방창하구나.

대웅전.
대웅전.

어영차 대들보 아래쪽으로 던지니 대지에 뽕나무 삼나무 초목들도 기름진 들판 열어내니 할 일 이미 마쳐서 절 일이 한가롭고, 때때로 범종소리 들으니 평안한 곳 되었네.

상량한 이후 엎드려 원하옵나니,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 사방의 오랑캐가 감복하고, 모든 정령 감응하여 온 세상이 평온하게 하소서.

만세에 덕화 미침 칭송하고 법당 지움 기념하며 붙여 읊는다. 해로움도 없고 재앙도 없음이여 이 법당에 들어오면 영원히 좋으시고, 기울지도 말고 썩지도 말아라, 후세인의 중수를 기다리도다."

이태호 이천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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