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사 대웅보전
보광사 대웅보전

◇보광사의 연혁

파주 보광사는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고령산 앵무봉 산자락에 위치한 파주의 대표적인 명찰이다. 1980년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까지 양주군에 속하였고, 조선시대 초기 까지는 절이 위치한 산과 같은 이름인 고령사로 불리다가 조선중기에 들어와 지금의 보광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보광사의 연혁을 들여다보면, 보광사는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며, 고려중기에 원진국사가 중창하였고 고려말기에 무학대사가 다시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사찰이 모두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 후 거의 폐사에 이른 사찰을 17세기에 들어와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영조 때에는 왕의 생모 숙빈 최씨의 기복사로 되었다. 조선말 고종년간에 들어와 다시 전각을 크게 중창하였는데 한국전쟁으로 많은 전각을 잃었으나 이후 지속적인 불사를 통해 소실된 전각들을 복구하고 현재까지 오래된 사찰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웅보전 판 벽화
대웅보전 판 벽화

◇현존 최고의 판벽화가 그려진 대웅보전

이러한 천년고찰 보광사에는 보물급 전각인 대웅보전과 만세루 외에도 지장전, 응진전 등의 전각내의 불화, 불상, 동종, 금고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성보 문화재가 존재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현존하는 최고의 판벽화가 있는 대웅보전이다.

보광사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왔다. 1979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건물 전체를 감싸는 빛바랜 단청과 이에 대비되는 화려한 공포와 섬세한 조각, 봉안된 불상과 불화가 그 가치를 더한다. 그러나 이 전각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건물에 그려진 판벽화이다. 일반적인 흙벽이나 회벽이 아닌 나무 판재로 된 외벽에는 기둥 한 칸씩마다 다른 불화가 그려져 있는데 법당 내부 벽화는 전통사찰에서 자주 보이지만 외부 판벽화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몇 안되는 현존하는 판벽화 중에서도 보광사 대웅보전의 판벽화는 코끼리를 탄 동자상을 비롯해 연화보살, 신장상, 용선(龍船), 수석도(水石圖), 연화생도(蓮花生圖) 등 소재의 다양성과 미학적 측면에서 첫 손에 꼽힌다. 그렇다면 이 판벽화는 언제 누가 제작했을까?

 

보광사 대웅보전 판벽화 용선접인도
보광사 대웅보전 판벽화 용선접인도

이 질문의 답은 1898년의 보광사 불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해는 그간 이루어진 수많은 보광사 불사에 있어 가장 주목되는 해이다. 1901년 작성된 한국사찰전서의 ‘고령산 보광사 법전중창 병단호기서’에 따르면 1896년에 인파영현(仁坡英玄)이 상궁 천씨에게 취전(鷲殿, 사찰의 주요 전각인 대웅전을 지칭한다)을 중수하는 불사를 권하여 불사의 뜻을 세우고 1897년에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898년 봄 순비 엄씨와 상궁 홍씨의 시주로 단청불사가 행해졌다. 이때 판벽화가 제작되었고, 이와 함께 전각을 장엄할 영산회상도를 비롯하여 삼장보살도, 현왕도, 칠성도, 독성도, 감로도 등 6점의 불화가 조성 봉안되었다.

1898년 불사에 대한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대웅보전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시기와 함께 판벽화의 제작 시기를 정확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 기록에 더하여 2017년 보광사 대웅보전 해체보수 및 단청벽화 보존처리 공사 중 종도리 가운데에서 뚜껑으로 봉인된 1898년 중수 상량문을 찾아냄으로써 조선후기 중창 과정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때 상량문과 함께 수습된 양간록과 은판, 비녀와 수저, 가락지 등의 복장물을 통해 당시 보광사의 사세와 왕실의 후원이 어떠했는지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절의 오랜 역사에 비해 그 연혁을 뒷받침할 자료가 소략했던 상황에서 조선후기 중창과정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확보함으로써 현재의 보광사가 있게 된 내력을 알게 된 것이다.

◇영조의 효심이 깃든 어실각과 향나무

보광사 대웅보전 현판(갑자중추옥간서).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는 대웅보전 현판 또한 분바탕에 먹으로 쓰인 글씨로 사찰 현판 중에서는 그 사례가 드물다. 사찰 현판은 대부분 먹바탕에 금이나 분으로 도체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분바탕에 먹글씨는 궁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이다. 현판에 ‘甲子仲秋玉澗書(갑자중추옥간서)’라 쓰여있다.현판 배면 묵서에는 1898년 단청개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보광사 대웅보전 현판(갑자중추옥간서).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는 대웅보전 현판 또한 분바탕에 먹으로 쓰인 글씨로 사찰 현판 중에서는 그 사례가 드물다. 사찰 현판은 대부분 먹바탕에 금이나 분으로 도체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분바탕에 먹글씨는 궁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이다. 현판에 ‘甲子仲秋玉澗書(갑자중추옥간서)’라 쓰여있다.현판 배면 묵서에는 1898년 단청개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보광사의 현재 모습은 영조와 대원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보광사가 다시 주목받게 되는 시기는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淑嬪崔氏, 1670-1718)의 묘인 소령원(昭寧園)의 원찰(願刹)이 되면서이다. 한국사찰전서 등에는 소령원의 능원사찰 지정연도를 1740년으로 적고 있는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기록을 종합할 때 소령원으로 추봉된 시점은 1753년이다. 영조는 즉위 후 소령원에 신도비를 세우고 그 비문과 글씨를 당대 최고의 종친들로 하여금 짓고 쓰게 했다. 소령원 근처에 있던 보광사를 숙빈 최씨의 원찰로 삼고 사찰 내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실 어실각을 짓고 친히 향나무를 심었다.

상량문(보존처리 후) 내요은 다음과 같다보광사(普光寺)의 기원을 고찰하면 신라의 고승 옥룡자(玉龍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창건)하였다고 이미 기록에 실려 있으며 강희(康熙) 연간)에 석련(釋蓮) 등이 중수하였다. 또 상량문을 보면 알겠지만 오늘날의 중수를 헤아려 보니 모두 네 차례이다. 이전의 중수 기록은 증명할 만한 문헌이 없으니 어찌 연대를 상세히 알 수 있겠는가.건양 2년(1897)에는 한 사람이 맡아서 진행하였고, 옛적 강희(康熙) 가을에는 지간(智侃)·석련(釋蓮) 두 분이 시행하였다. 절 문이 여러 개이고, 전각이 수십 채이다. 풍행초언(風行草偃)5)은 교화에 열심히 노력한 인파 화상(仁坡和尙)에 견줄 수 있고, 우담화가 핀 것은 상궁 천씨(千氏)의 신앙심이 발휘된 것과 거의 같다. 낡은 건물을 버리고 열 채의 집을 지었다. 수많은 진기한 재물이 들어갔는데 모두 우뚝한 전각이다.
상량문(보존처리 후) 내요은 다음과 같다보광사(普光寺)의 기원을 고찰하면 신라의 고승 옥룡자(玉龍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창건)하였다고 이미 기록에 실려 있으며 강희(康熙) 연간)에 석련(釋蓮) 등이 중수하였다. 또 상량문을 보면 알겠지만 오늘날의 중수를 헤아려 보니 모두 네 차례이다. 이전의 중수 기록은 증명할 만한 문헌이 없으니 어찌 연대를 상세히 알 수 있겠는가.건양 2년(1897)에는 한 사람이 맡아서 진행하였고, 옛적 강희(康熙) 가을에는 지간(智侃)·석련(釋蓮) 두 분이 시행하였다. 절 문이 여러 개이고, 전각이 수십 채이다. 풍행초언(風行草偃)5)은 교화에 열심히 노력한 인파 화상(仁坡和尙)에 견줄 수 있고, 우담화가 핀 것은 상궁 천씨(千氏)의 신앙심이 발휘된 것과 거의 같다. 낡은 건물을 버리고 열 채의 집을 지었다. 수많은 진기한 재물이 들어갔는데 모두 우뚝한 전각이다.

이후 오랜 시간 조선 왕실의 원당으로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오면서 큰 사세를 유지해왔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대웅보전에 걸려있는 고령산 보광사 상축서라는 판각이다. 상축이란 사찰에서 임금과 왕비와 태자를 위해 축원하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고종 등극(1864) 후에 궁궐을 신축하고 사찰을 신창함에 보광사도 이전양료를 일시에 새로 지었으니 이는 국가의 홍운이요 대원군의 숙원 소치였다고 한다. 대원군이 대웅보전의 대중창과 전각의 신창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만세루와 목어

보광사 만세루
보광사 만세루

한편 대웅보전의 맞은편에는 대웅보전과 함께 보광사를 대표하는 전각인 만세루가 있다. 1740년 무렵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만세루는 정면 9칸에 승방이 딸려 있으며 본래는 누각 형태였다. 지금은 만세루라 불리지만 건물 앞에 걸려있는 편액에 ‘염불당중수시시주안부록念佛堂重修時施主案付祿’이라 적혀 있어 ‘염불당’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만세루는 19세기 말 서울과 경기지역 사찰에서 유행한 누각 형태의 대방(승려들이 모여 식사하거나 생활하는 큰 방, 염불 수행을 하는 법당)을 대표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 전각의 단연 백미는 마루 위에 걸려있는 ‘목어’이다. 길이 287cm, 두께 68cm의 이 목어는 물고기의 몸에 뚜렷한 용의 얼굴을 하고 있다. 눈썹과 둥근 눈, 툭 튀어나온 코, 여의주를 문 입, 그리고 머리에 뿔까지 있어 龍頭魚身形 목어연구의 대표적 자료로 꼽힌다.

◇보광사 현존 유물 중 가장 오래된 숭정7년명동종

‘파주보광사숭정7년명동종’,1634년, 대웅보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58호
‘파주보광사숭정7년명동종’,1634년, 대웅보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58호

 

보광사에 현존하는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34년에 조성된 '('숭정7년명동종' 坡州普光寺崇禎七年銘銅鐘)'이다. 사찰 내 범종각에는 복제품이 걸려있고, 실물은 대웅보전 안에 있다. 전체 높이 98.5cm의 중간 크기의 종으로 조선 후기 범종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이 동종에는 종의 제작을 비롯해 보광사의 연혁에 관한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는데 이는 보광사와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다.

이 절은 고려 때 도선국사께서 국가의 비보사찰로서 지으셨다 한다. 조선에 이르러 명나라 만력(萬曆) 20년의 병화에 전소되어 사슴의 놀이터가 된지 오래다. 30년이 지난 임술년(壬戌年, 1622)에 해서지방의 스님 설미와 호서지방의 스님 덕인이 비로소 이 터에 들려 몹시 탄식하며 말하였다. "유명한 사찰이 빈 터로 남아있으니 복구하지 않을 수 없구나"하고 설미는 법당(法堂)을, 덕인은 승당(僧堂)을 지었다. 이로써 사방에서 현사(賢師)들이 구름같이 모였고, 갖가지 도구도 예전에 못지않게 구비했으나 종 하나가 없어서 흠이었다. 덕인 스님이 이를 애석하게 여겨 생각하던 끝에 숭정(崇禎) 신미년(辛未年, 1631)에 도원(道元) 노승을 화주로 추대하니, 3년 동안 애써서 청동 80근을 모으고 중도에서 물러갔다. 지금의 화주 신관(信寬)은 해서지방 스님인데 주지 학잠(學岑)의 추천을 받아 도원의 뒤를 맡은 분이다. 이 때 절의 대중 20명이 힘을 다해 도왔고 별좌(別座)인 지십(智什)은 덕인 스님의 제자인데 덕인 스님의 본을 받아 정성을 다하는데 조금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명문에 따르면 보광사는 선각국사 도선이 창건한 이후 임진왜란으로 절이 전소되었다가, 설미스님과 덕인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 17세기에 새롭게 중창되는 보광사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다.

보광사 대웅보전 내부. 대웅보전 안에는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2구의 협시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이 중 좌협시 보살상의 복장에서 조성 발원문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따르면 보살상은 영색을 비롯한 5명의 승려 조각승들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 보살상들은 발원문을 통해 정확한 제작 연대, 제작자, 존상 명칭 등이 밝혀져 있어 17세기 전반기 불교 조각 연구에 기준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보광사 대웅보전 내부. 대웅보전 안에는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2구의 협시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이 중 좌협시 보살상의 복장에서 조성 발원문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따르면 보살상은 영색을 비롯한 5명의 승려 조각승들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 보살상들은 발원문을 통해 정확한 제작 연대, 제작자, 존상 명칭 등이 밝혀져 있어 17세기 전반기 불교 조각 연구에 기준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이외에도 보광사의 전각들에는 지정 또는 비지정 불화와 불상이 약 50여 점이 넘게 있어 가히 성보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곳곳에 숨어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불화와 불상, 금고, 현판 들을 꼼꼼히 둘러보고 있노라면 쏠쏠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만세루 툇마루에 걸터 앉아 한가로이 대웅보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은은한 풍경소리와 함께 시간이 멈춘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찰에서 시간을 보낸 후 지장전과 원통전 사이로 나있는 남쪽 담장 문을 나가는 것도 좋다. 개울의 물소리를 들으며 비탈길을 오르면 전나무 숲을 만나게 되는데 잠시 앉아 즐길 만한다.

신민경 파주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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