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튀르키예 군인들은 전쟁으로 상처 입은 아이들의 부모를 자처하며 ‘수원앙카라학원’을 세웠다. 한국전, 그 참혹했던 전쟁 속에도 튀르키예 군인들은 수원 앙카라 학원에서 이 땅의 아이들을 보호하고 가르쳤다.

70년이 지난 지금 점차 희미해지는 앙카라학원의 의의를 재조명하기 위해 중부일보는 8월 13일부터 21일까지 튀르키예 이스탄불·앙카라 참전용사회, 튀르키예 국방부 군사역사기록보관소, 주 튀르키예 한국대사관, 적신월사(적십자) 등을 방문해 취재했다. 

중부일보는 총 10회에 걸쳐 ‘월드리포트 앙카라 학원의 기억과 기록’을 연재하며 참전 용사들의 생생한 증언과 현지 기록을 통해 한국과 튀르키예 우호관계의 원천을 재확인한다.  


<5>한국전 참전용사를 만나다
베카스 고지의 영웅 야샤르 예켄

 

메달을 내보이며 취재진에게 설명하는 야샤르 예켄(93)하사 한국전 참전용사
메달을 내보이며 취재진에게 설명하는 야샤르 예켄(93)하사 한국전 참전용사

오후 19시 50분 아군고지를 향해 적의 연막탄이 발사됐다. 고지는 연막으로 둘러 싸였다. 적은 연막으로 시야를 차단하고 아군을 향해 접근할 것이다. 적의 공세가 임박했다.

아군은 연기 장막에 숨어있을 적을 향해 즉시 사격했다.

적군은 5분 뒤에 몰려왔다. 고지를 지키는 아군은 1개 중대, 북쪽에서 접근해 오는 적들은 최소 2대대 이상으로 동서로 나뉘어 아군을 조여 왔다.

연막 속에서 근접거리에서 사격이 시작됐다.

적군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고지로 밀려왔다. 얼마 되지 않아 전투는 총검을 사용하는 육박전에 돌입했다.

중과부적, 아군은 전방고지와 이어진 후방고지로 후퇴했다. 이곳은 밀릴 수 없었다. 아군은 거세게 저항했고, 적은 20시 50분 공격을 중단했다.

잠깐의 소강상태, 인근 중대에서 병력을 지원받고 반격에 나섰다. 반격은 성공, 아군 다시 21시 23분 전방고지를 탈환했다.

적군을 밀어내던 아군은 고지 근처에서 매복 중인 적군과 다시 조우했다.

연막이 다시금 고지를 덮고 백병전이 이어졌다.

고지에서는 팽팽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후퇴한 적군은 재정비를 마치고 재차 공세를 시작했다.

23시 6분 아군은 다시 전방고지를 상실했다.

아군은 전방고지에 대한 포격지원을 받고 용기를 내어 다시금 몇 배의 적속으로 뛰어들었다.

일진일퇴의 공방이 지속된 고지전,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지만 실제 한국전 당시 튀르키예군과 중공군 사이 치러진 네바다 전투(베가스 고지전)의 단면이다.

1953년 5월 28~29일 벌어진 네바다 전투는 튀르키예군이 파주 일원의 베가스, 엘코, 카슨, 베를린 고지를 중공군을 상대로 격전 끝에 격퇴한 전투다.

‘터키인이 본 6.25전쟁(알리 데니즐리)’에 따르면 이 전투로 튀르키예군은 약 45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중공군은 약 3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엘코 고지를 지키는 6중대의 생존자는 8명, 카슨 고지를 방어하던 공병중대는 10명만 남았다.

양측이 가장 접전을 벌인 베가스 고지는 만 하루 동안 최소 9번 주인이 바뀌었다.

베가스 고지를 사수하고 튀르키예 깃발을 올리는 야샤르 예켄. 사진=아시아문화연구원
베가스 고지를 사수하고 튀르키예 깃발을 올리는 야샤르 예켄. 사진=아시아문화연구원

이 전투로 튀르키예 여단이 소모한 포탄은 보병용 총탄 245만3천 발, 박격포 6만2천 발, 수류탄 등 7만9천 발, 튀르키예 포병대 2만7천 발, 미국 포병대는 11만2천 발 등으로 얼마나 치열한 격전이 이루어졌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휴전(1952년 7월 27일)을 두 달 앞둔 시점에 발생한 전투로 튀르키예군의 마지막 전투이자, 가장 희생이 큰 전투이기도 했다.

전쟁 막바지에 발생한 안타까운 희생이었고 튀르키예군이 치른 영웅적인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영웅적 전투에서 병사들을 이끌며 끝내 베가스 고지를 사수하고 튀르키예 깃발을 올린 야샤르 예켄(94) 하사는 그 공적을 한국과 튀르키예 양국에서 인정받은 전쟁 영웅이다.

전쟁 영웅과의 인터뷰 과정도 극적이었다.

최초 야샤르 예켄 하사와 인터뷰가 약속됐지만 출국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건강악화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전달됐다.

취재진이 야샤르 예켄씨가 있는 앙카라에 도착한 8월 16일 당시에도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취재진은 인터뷰는 포기하고 전쟁영웅에 대한 예우 차원의 병문안만 계획했다.

그와 예정된 면회시간은 30분, 취재진은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상상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만난 그는 노쇠한 환자가 아닌 참전용사의 모습으로 취재진을 맞았다.

깔끔한 정복으로 갈아입고, 당당히 일어서 취재진을 만났다. 먼 곳에서 온 취재진을 그렇게 만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비록 발음은 어눌했지만 인터뷰 내내 목소리는 우렁찼고, 눈동자의 생기는 여전했다.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며 내젓는 손짓에서도 힘이 느껴졌다.

취재진을 반기는 그의 첫 마디는 "우리는 형제다. 튀르키예 오신 것을 환영한다. 병원까지 와주신 것에 감동을 받았고, 너무 감사하다"며 인사를 전했다.

야샤르 예켄 참전용사와 그의 젊은날의 사진
야샤르 예켄 참전용사와 그의 젊은날의 사진

야샤르 예켄씨는 다른 참전용사들 보다 비교적 한국전과 앙카라학원에 대해서도 또렷이 기억했다.

그는 "(나는)베가스 전투에 참전 했다. 전쟁 중에 강가에서 주둔해 있었고, 많은 중국군들이 몰려왔지만 끝까지 그곳을 지켰다. 도망가지 않았다"고 큰 목소리로 강조했다.

이어 취재진에게 전쟁의 공적으로 수여받은 메달을 내밀며 "박물관에만 있는 특별한 메달"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메달에 대해 그는 "내가 메달을 자랑하거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군인연맹에서 준 것인데 전사한 모두를 위해 받은 것이다. 내 모든 동료들과 함께 받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오늘 만남으로 옛 기억이 떠올라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당시 튀르키예 군가 ‘목적은 부산이다’를 취재진과 만남에 앞서 부르기도 했다고 전했다.

야사르 예켄이 수여받은 메달들
야사르 예켄이 수여받은 메달들

한국을 지켜낸 영웅이지만 참혹한 전쟁은 그의 마음에 지워 지지 않을 상흔을 남겼다.

그는 "70년 전 일들이 한 달 전에 꿈에 나왔다. 한국에서 쓰러뜨린 중국군들이 꿈에 나와서 ‘당신 우리를 죽였다’며 추궁했다"며 "꿈에서도 그들에게 ‘어쩔 수 없었다’고 답하며 두려운 감정과 함께 꿈에서 깼다"고 말했다.

또 "어느날 만난 중국대사관 직원이 자신에게 중국 사람들을 죽였다며 자신에게 분노했다"며 "70년이 지났지만 이런 일이 있어 슬프다. 우리는 한국을 형제로 생각했고, 중국군을 쓰러뜨린 것은 우리나라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 전쟁 속에 있다"고 덧붙였다.

앙카라학원에 대해서도 기억을 전했다.
 

만 하룻새 9번 주인 바뀐 베가스 전투서 
고지 사수하고 튀르키예 깃발 올린 영웅
"우리는 형제" 정복 입은채 취재진 환영
메달 내밀며 "전사한 이를 위해 받은 것"
요즘도 꿈에 중국군 나타나 추궁받기도

고지를 사수하고 튀르키예 깃발을 올린 야샤르 예켄
고지를 사수하고 튀르키예 깃발을 올린 야샤르 예켄

"전선에서 복귀할 때 우리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같이 돌아왔다. 아이 한명과 친구들이 계속 다리를 잡고 돌며 놀았던 것이 기억난다"며 "우리는 전쟁하면서 아이들를 키우고 2명은 앙카라 대학교까지 진학하는 것을 도왔다. 한명은 박씨 성을 가지고 있다"고 돌이켰다.

이어 "전쟁 당시 튀르키예 초등학교에서 앙카라 학원에서 필요한 것들을 보내줬다"며 "전쟁이 끝나고 한국에 방문했을 때 앙카라 학원이 문이 닫혀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한국에 많이 다녀왔는데 한국은 그때마다 새로운 모습 보여준다. 개발된 것도 새롭고 그 모습이 기쁘다.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참전하길 잘했다는 마음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도 튀르키예 국기 흔들고 승패에 상관없이 많이 웃었고 너무 재밌었다"며 소회를 전했다.

인터뷰 마지막에서는 유쾌한 모습도 보여줬다. 한국전 당시 한국 사람들이 그에게 잘생겼다며 한국여자를 왜 만나지 않느냐고 농담을 던지자 전쟁하기 바빠서 연애할 시간이 없었다고 답했던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취재진이 떠날 때는 불편하지만 일어서야 한다며 다시 휠체어에서 일어나 취재진 모두와 악수를 했고, 취재진은 사양했지만 병원 문까지 배웅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취재진에게 "한국사람들이 튀르키예 사람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돌아가서 인사를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중부일보 취재팀=강경묵 문화부장·김용국 박사·용인외국인지원센터장·공익법인 아시아문화연구원장·안형철 문화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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