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기사 일주문
만기사 일주문

가을이 내린 진위천 은행나무 길을 따라 무봉산 자락에 도착했다. 만기사 일주문 바로 옆 무봉산 청소년 수련원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높이 솟은 일주문을 지나 최대한 천천히 걸어가며 가을을 온몸으로 느껴본다. 지난 봄과 새삼스레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은 계절 때문일까를 생각하며 오랜만에 뵐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만기사 경내 모습
만기사 경내 모습

봉황이 춤추는 무봉산(舞鳳山)

멀리 만기사를 감싸 앉은 무봉산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만기사가 자리 잡은 이곳 무봉산은 해발고도 208M다. 내로라하는 산들 앞에 명함조차 내밀기 힘든 야트막한 산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무봉산을 얕잡아보고는 ‘무봉산(無奉山)’라고 생각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무봉산(舞鳳山)’이다. 봉황이 춤추는 형상을 그리며 산을 바라보면 만기사 양 옆으로 늘어선 높은 소나무군이 봉황의 너른 날개마냥 절을 지킨다.

이 곳 무봉산은 평평한 땅, 평택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여지도서에 "진위현의 북쪽 5리에 있고 용인 응봉산에서 줄기가 이어진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진위현의 진산(鎭山)이라고 한 ‘부산(釜山)’은 ‘무봉산’의 한 줄기이며 두드러진 산세를 나타내지 못한다. 그래서 1872년 지방지도에는 읍치 뒤편에 ‘무봉산’을 진산처럼 표시했다. 무봉산 정산부에 오르면 서남쪽으로 양성의 천덕산이, 서쪽으로는 조선 시대 삼남대로가 지났던 1번 국도가 보인다. 무봉산 자락 남쪽 끝에 옛 진위현의 치소(治所)였던 봉남리가 있고, 봉남리 앞으로는 조선 시대 장호천(長好川)이라고 불렀던 진위천이 흐르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역시 평택의 산 중 산이다.

만기사 대웅전
만기사 대웅전

평택 대표 천년고찰 만기사(萬奇寺)

만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942년 고려전기 승려 남대사(南大師)가 창건했다. 이후 조선 세조(재위 1455∼1468)의 명으로 중창했다. 설화에 따르면, 세조가 이 부근을 지나다가 이 절에서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 샘 이름을 감로천(甘露泉)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절을 중창하도록 명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우물은 임금이 마신 물이라고 해서 마을 사람들은 어정(御井)이라고 불러왔다. 현재는 이런저런 이유로 마실 수 없는 상황인 듯하다.

현재의 절은 19세기 말 인근에서 옮겨온 것이고 한다. 1972년 혜송(慧松)스님이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를 세웠다. 1979년 요사채 일부가 불에 타 없어지자 이듬해 더욱 크게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대웅전은 1993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사실 만기사에는 약사여래로 추정되는 파손된 불상과 함께 축대를 쌓는 돌로 사용된 석탑의 덮개돌, 석등 부재 등 나말여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쌓여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경내에 복원이 불가능하지만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재(石材)들이 많이 산재했었다고도 전한다. 이런유물들은 대웅전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과 더불어 이 절의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러나 십수 년 전 사역을 확장하고 다시 축대를 쌓는 과정에서 이 유물들이 사라졌다. 만기사 관계자에 의하면 이 유물들을 따로 보관하지 않아서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만기사 철조여래좌상
만기사 철조여래좌상

고려시대 철불의 상징, 만기사 철조여래좌상(보물)

대웅전 안에 1972년 보물 제567호로 지정된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이 있다.

신라 말부터 유행하던 철불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양식적으로는 불국사에 있는 9세기경 금동아미타불좌상이나 금동비로자나불좌상,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 등 장신 계통의 불상을 이어받은 고려시대 불상이다.

불국사 금동아미타불 좌상
불국사 금동아미타불 좌상

철조여래좌상을 마주하면 높이는 143cm로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지금은 두껍게 개금(改金)되어 원래의 세부적인 모습을 파악하기 조금 어렵다. 하지만 불상을 받치는 대좌(臺座)와 오른팔과 양손은 모두 나중에 보수한 것을 감안해도 본래 남아있던 불신(佛身)만으로도 그 비례가 아름다웠음이 이해된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불상은 머리(肉髻)가 높고 큼직하게 있으며 갸름한 얼굴에 알맞은 이목구비를 하고, 목에는 3줄의 삼도가 뚜렷하며, 귀는 긴 편이다. 어깨는 넓고 가슴이 발달되어 상체가 약간 긴 편이나 크고 넓은 결가부좌한 다리를 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은 편이어서 안정감이 있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으며, 옷주름 표현은 왼쪽 어깨의 삼각형의 옷접힘과 무릎 부분에 세 가닥으로 세로줄이 접혀 있는데, 약간 도식적으로 새겨졌다. 손모양'手印'은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배 부분에 놓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또 문화재는 아니지만 철조여래좌상 뒤의 후불탱화는 나무에 조각한 이른바 ‘목각탱’이다. 불화를 나무에 조각한 뒤에 금물을 올려 전체적으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좌우 협시보살도 이러한 화려함에 한 몫을 더한다. 본래 철불의 모습을 찾기 어려워 아쉽다하는 사람도 있지만 현재의 모습에서 종교적 이콘(icon)으로서의 화려한 위엄이 느껴져 나름 좋다.

만기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무봉산
만기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무봉산

지금의 만기사가 되기까지 원경스님의 노력

천년고찰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천년고찰이라고 하지만 허름했던 만기사가 지금의 도량으로 중창될 수 있었던 것은 지난해 입적하신 원경스님(1941~2021)의 노력으로 전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 만기사는 몇 번의 화재와 중창을 거듭하면서 사찰 건물과 주차장과 도로가 생기면서 지금은 누구나 방문하기 편한 절이 되었다.

원경스님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창당을 주도했던 한국 근현대사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인 ‘박헌영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스님은 1950년 초 부모의 지인들이 일제히 검거되면서 남로당의 연락책 한산 스님의 손에 이끌려 지리산 화엄사에 맡겨졌다. 이런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스님은 1986년 민족문제연구소 발족에도 기여하셨으며 1995년부터 만기사의 주지를 맞아오셨다. 경내에 마련된 작은 연못에 앉아 한가로이 절을 둘러보니 구석구석 원경스님의 노고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완만한 무봉산 언덕 위의 만기사 대웅전에서 바람에 섞인 풍경소리를 듣고 있으면 천년이라는 시간이 찰나처럼 느껴진다. 이번주 만기사에서 보내기 아쉬운 가을을 느껴보면 어떨까.

박혜원 평택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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