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복사 일주문(광덕산심복사)
심복사 일주문(광덕산심복사)

기분좋은 따스함을 주는 햇살과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바람의 조화로움이 있는 가을의 끝자락에 심복사를 걸어보고자 한다.


◇나말여초(羅末麗初) 서해로 나아가는 길목에 자리잡다

심복사는 고려시대 광덕현의 주산으로 광덕산이라 부르던 것이 현재는 고등산으로 이름이 변한 산자락 아래 고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사찰의 창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설화와 석조비로자나불상의 제작시기를 통해 볼 때 나말여초에 사찰이 창건되거나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사찰 연혁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1934년 법당을 해체하고 중건 불사를 하면서 ‘만력3년(萬曆三年)’(1575년) 명문기와가 발견되었고 내원당 앞 석주에 ‘강희44년(康熙四十四年)’(1705)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법당 대들보 상량문 묵서에 남아있는 ‘건릉33년(乾陵三十三年)‘(1767) 명문들을 볼 때 조선중기에 사찰의 중창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1824~1825년, 1856년, 1875년에도 중수와 단청불사가 진행된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 말까지 사찰의 명맥이 이어져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창건 배경일텐데 나말여초에 사찰이 창건되었던 것은 심복사가 서해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안전과 안녕을 기원하는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심복사 맞은편에 위치한 하양창(河陽倉)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심복사 앞을 흐르는 안성천을 가로지르면 팽성읍 노와리가 보이는데 이곳은 고려 초 12조창 중 하나인 하양창(河陽倉)이 있던 곳이다. 조창은 국가의 조세(租稅)로 거둔 현물을 배를 이용하여 경창으로 옮기는 아주 중요한 곳으로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인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공주, 청주 등 충청도에서 육로를 통해 모여든 조세를 경창으로 운송하는 시작점에 심복사가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조창인 하양창의 맞은편에 심복사가 위치했다는 것은 많은 물산이 모여 바다로 나아가야 하는 뱃사람들에게 하나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고 날씨와 바다가 고요하여 무사하길 바라는 염원을 담는 공간이기도 하며 서해로 나아가는 출발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심복사 우(牛)보살 무덤
심복사 우(牛)보살 무덤

◇우보살(牛菩薩)이 광명(光明)을 모시다

심복사에는 불상을 모시고 창건하게 된 설화가 전해져 온다.

어느 날 광덕면 어은동 앞 바다로 천씨·문씨·박씨 세 노인이 뱃일을 하러 나아가서 그물을 치고 기다리던 와중에 무언가 걸려서 들어 올렸더니 부처님 형상의 돌이었다. 무게가 많이 나갈 것 같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나뭇잎처럼 가벼워 손쉽게 건져 올릴 수 가 있었다.

이 일이 있기 전날 밤 노인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나 있을 곳은 신복(新福)이니 파선된 배 두 척과 소 세 마리가 있을 것이니 이것을 날라 절을 세우라’ 하였던 꿈과 일치한 것을 깨달은 노인은 해안가에 도착한 후 신복으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신복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어 석불을 등에 업고 광덕산으로 가던 중 갑자기 무거워져 한걸음도 나아가질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곳이 신복이라 생각하고 석불을 자리에 내려놓게 되었다. 며칠 후 난파된 두 척의 배와 소 세 필이 나루터에 발견되었는데 이는 석불을 모실 절을 세우라는 뜻이라 생각하고 목재를 실어 소로 하여금 이것을 이끌게 하여 석불로 향하였다. 도착 후 소는 운명을 달리하였고 난파된 목재를 사용하여 절을 지었는데 이를 신복사라 부르고 법당의 현판은 능인전(能仁殿)이라 했다.

우보살을 기리는 행사를 형상화한 최근 벽화
우보살을 기리는 행사를 형상화한 최근 벽화

지금도 이때 심복사의 창건을 도운 소를 기리기 위한 무덤이 사찰에서 500m 떨어진 곳에 모셔져 있으며 매년 절을 짓는데 큰 공을 세운 소를 기리며 제를 지내고 있다.

이처럼 심복사의 창건설화에는 소가 등장하는데 소는 불교에서 지혜를 터득하고 실천하며 자비를 보여주는 구도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사찰을 다니다 보면 사찰 건물 벽면에 그려져 있는 동자와 소 그림을 보게 되는데 불교 선종에서는 자신의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심우도(尋牛圖)가 그것이다. 보통 열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하며 어린 동자가 검은색의 사나운 소를 얻어 길들이는 과정에서 검은색이 흰색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다 결국에는 흰색의 소로 탈바꿈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때 검은소가 흰소가 되는 과정이 우리가 서서히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과 유사하다.

심우도는 언어와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부처님이 가르친 언어 밖의 의미를 되새기고 사람 마음의 실상을 찾아 부처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선(禪)의 모습을 보여주며 서서히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여기서 소는 본성을 찾는 하나의 매개체이자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도 소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소는 부처님의 경전을 운반해 주어 불법을 세상에 널리 펼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였으며 공덕이 신앙행위를 초월하여 깨달음을 추구하고 전파해주는 역할까지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심복사에서의 소는 석불을 옮겨 복덕을 쌓은 것으로 사찰 창건에 도움을 준 행위는 중생이 찾아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였고 이로 인해 불법을 많은 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전파자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어 소가 불교에서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심복사 대적광전(남동-북서)
심복사 대적광전(남동-북서)

◇광명(光明)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세상을 밝히다

심복사에는 보물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모셔져 있다. 대적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원래 명칭은 능인전(能仁殿)이었으나 1988년 새롭게 전각을 짓게 되면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 명칭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대적광전은 ‘화엄경’에서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전각이라는 뜻으로 비로전이라고도 하며 주로 화엄종 사찰에서 진리의 빛이 가득한 세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각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은 산스크리트로 태양이라는 뜻인데 대광명을 발하여 법계를 두루 비춘다는 의미를 가진다. 좌우에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 삼존불을 모셔 세 부처가 삼위일체를 이룬 조화로운 세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심복사에는 비로자나불 본존만이 모셔져 있다.

심복사 대적광전(정면)
심복사 대적광전(정면)

심복사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대좌(臺座)를 포함한 전체 높이 236㎝, 불상의 높이는 128㎝로 광배는 없으며 통형의 삼단 연화(蓮花)대좌 위에 가부좌(跏趺坐)의 비로자나불이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智拳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옷의 모양과 조각기법이 여주, 안성, 원주, 홍천, 강릉 등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의 나말여초 석불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나말여초 전환기의 과도기적인 불상으로 보고 있다.

이 당시 정치적 상황은 신라의 힘이 점차 약해지면서 각 지방세력이 할거하고 점차 후삼국이라고 하는 정치체를 새롭게 구성하며 고려로 나아가는 시점이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세상을 비추고 안정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 불상을 제작하게 된 하나의 동인이지 않았을까 한다.

심복사 앞 연못
심복사 앞 연못

◇신복사(新福寺)에서 심복사(深福寺)로 천년의 역사를 이어가다

심복사에 대한 기록은 ‘여지도서(輿地圖書)’, ‘수원부읍지(水原郡邑誌)’, ‘화성지(華城志)’, ‘기전영지(畿甸營誌)’, ‘수원군읍지(水原府邑誌)’ 등에 ‘광덕산에 있다’ 혹은 ‘부 남쪽 80리 광덕면 광덕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장소의 주체는 신복사였다. 그렇다면 신복사가 심복사로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제강점기인 1911년 당시는 일제에 의해 시행된 사찰령으로 총독의 인가를 받아야했다. 초대주지로 황경운이 신복사 초대 주지로 등록되었지만 1913년 주지직에서 취소되었으며 다음해 전국적으로 지방행정제도 개편되면서 수원군이었던 심복사가 진위군으로 편입되었다.

심복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정면)
심복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정면)

 

1936년 심복사중수기 기록을 볼 때 1914년에서 1936년 사이에 신복사에서 심복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찰의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덕목리성 동문지
덕목리성 동문지

◇심복사와 고려시대 성곽들

경기도박물관과 단국대학교에서의 조사를 통해 심복사에서 서쪽으로 1㎞ 떨어진 덕목리성을 비롯해 북쪽으로 5~8㎞거리에 무성산성, 자미산성, 비파산성, 용성리성 등 나말여초에서 고려시대에 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들이 확인되었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가의 종교로 민간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가 이루어지던 시기이기 때문에 심복사 창건 시점인 나말여초의 정치적 상황과도 연결되며 심복사가 당시에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특히 덕목리성은 심복사에서 도보로 20분정도의 거리로 평지성이 동서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는 당시 행정의 중심역할을 했을 것이며, 심복사의 창건이 단순히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 졌다기보다는 서해로 나아가는 해로의 시작점이기에 국가에서 관심을 가지고 창건과 함께 관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목리성지 출토 기와
덕목리성지 출토 기와

더불어 덕목리성이 행정의 구심점이었다면 북쪽에 4개의 성은 남북으로 연결되어 서해안 방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성들과 사찰의 관계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창건 이후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보국을 위한 핵심역할을 했던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심복사는 나말여초 혼란스러운 시기에 광명을 비추어 혼란함을 잠재우고 바다로 나아가는 이들에게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 비로자나불과 함께 창건한 이래로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의 마음을 닦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맑고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고려시대 서해안의 길목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길을 비추던 심복사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란다.

김경탁 평택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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