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등사로 가는 길은 운악산(雲岳山) 입구에서 시작된다. 평소라면 차를 이용해 사찰 입구까지 가겠지만 이번은 등산객의 입장에서 걸어 오르기로 한다. 입구에 있는 일주문을 지나 현등사를 향해 오르다보면 산이 구름을 뚫고 올라 구름 위에 떠 있는 모양과 같다는 데서 붙어진 운악산 정상의 바위 봉우리가 언뜻언뜻 보인다. 사실 현등사까지 오르는 길은 포장도 되어있고 걷기 어려운 길은 아니다. 하지만 현등사를 지나쳐 오르기 시작하면 ‘악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바위투성이의 험준한 암벽코스가 펼쳐진다. 물론 해발고도 937.5m에 이르는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은 이루어 말할 수 없어 화악, 관악, 감악, 송악과 함께 경기 5악이라고들 하지만 나의 목적지는 언제나 중턱인 현등사에서 멈춘다.

현등사 전경.
현등사 전경.

 

운악산 입구 일주문 지나 대부분 길 포장

2km 걸으면 불이문…옆엔 108계단 펼쳐져

고려후기 추정 삼층석탑 '지진탑'이 반겨

540년 신라 법흥왕, 운악 봉한 기록 있어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현등사'로 명칭돼

현등사의 위치에 대하여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현 북쪽 30리 화악산에 있다고 쓰여 있고 운악산에는 지장암이 있다. 다음 문서인 동국여지지도 마찬가지로 기록하면서 운악산을 현등산이라고도 부른다는 글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이후의 기록과 고지도들에서 현등사의 위치는 지금의 운악산 중턱으로 표시하고 있어 오기가 아닌지 추측해 본다.

입구를 출발하여 2㎞ 정도 걷다보면 현등사 경내 주차장에 다다르기 전 불이문을 만날 수 있다. 그 옆으로 난 108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1층 몸돌과 받침돌 일부가 없어진 고려 후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진탑이라 불리는 삼층석탑이 있고 이를 돌아서면 바로 경내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나는 별로 사용한 적 없는 무릎으로도 오르기 힘들어 계단을 지나쳐 오던 길을 따라 다시 오른다.

현등사 불이문. 
현등사 불이문. 

불이문을 조금 지나면 바로 현등사로 들어서기 전 작은 폭포가 정면에 있다. 이곳은 수량(水量)이 많을 때만 그 모습을 보이는, 폭포라 부르기도 작은 물줄기이지만 혹시라도 내가 가지고 들어온 작은 상념마저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을 자연히 두르게 된다. 폭포를 뒤로하고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계단과 비탈길이 보인다. 둘 중 아무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일곱 번 세워지고 무너졌다는 현등사의 전각들을 비로소 만날 수 있다.

현등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 그 연혁에 대해서는 1927년 쓰인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 내 현등사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운악현등사사적(雲岳懸燈寺事蹟 1772년)’, ‘현등사만취당성조기(懸燈寺晩翠堂成造記) 1767년’, ‘현등사중수기(懸燈寺重修記) 1918년’ 등의 옛 기록과 당시 남아있던 유적, 중요 인물들과 관련된 기록들을 수록하였다.

이 책의 1장 연혁에 따르면, ‘540년(법흥왕 27) 신라 법흥왕이 인도 승려인 마라가미 스님을 위해 대가람을 짓고 그 산을 운악(雲岳)이라고 봉한 후 만 결의 땅을 내렸다’고 하여 사찰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지만 그 창건을 말하고 있다. 물론 540년에는 백제가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략한 시기로 이때 한강 이남은 고구려의 영역이었기에 신라 법흥왕이 이곳에 절을 창건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지금의 현등사란 명칭은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중창한 이후 폐사되었던 곳을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하면서이다. ‘보조국사(普照國師)께서 망일산(望日山) 원통암(圓通庵)에 계실 적에 멀리 운악산(雲嶽山) 가운데서 한 밤중에 방광(放光)을 하는 것을 보았다. (중략) 전각의 남쪽 석대(石臺) 위에 옥으로 만든 등이 걸려 있었는데 그 불이 꺼지지 않았다. (중략) 오랜 잿더미 사이로 기이한 재목의 아름드리 기둥이 즐비했다. (중략) 타고 남은 것을 골라 절을 낙성하고 현등(懸燈)이라고 편액 했다'라고 사찰 이름의 기원을 밝히고 있다.

하판리 지진탑
하판리 지진탑

이와 함께 터에 남은 기를 진정시키고자 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앞서 언급한 지진탑이다. 기록에 의하면 절을 중창하고 탑을 조성한 것은 1210년(희종 6)인데 보조국사는 1210년 3월 순천 송광사에서 입적하였기에, 당시 경기도에서 사찰의 중창에 관여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순 있다. 하지만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 된 이 탑이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구성된 점, 지붕돌받침이 4단과 3단인 점, 기둥모양과 불상을 4개면에 표현한 점 등에서 고려 시대 만든 것으로 추정되니, 비록 보조국사 지눌이 아니라 해도 그 무렵 다시금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려 중창 이후 오래 못 버티고 폐사 운명

이후 조선 태종때 기화에 의해 다시 중창

세종대황 때 왕실과 긴밀한 관계로 발전

고려시대의 중창도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폐사가 되었던 현등사는 1411년(태종 11) 함허대사(涵虛大師) 기화에 의해 다시금 중창된다. 당시 기화는 삼각산에 머물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현등사 절터에는 전각 한 채와 그 옆의 탑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주변에 전각을 지을 만한 나무가 있어 왕실의 원당(願堂)을 세우고, 왕으로부터 300결의 토지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함허대사 기화는 무학대사의 제자로 세종대왕의 명령을 따라 개성에서 왕의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 왕과 신하들에게 설법을 펼치기도 하였던 고승으로, 현등사에는 3년 동안 있었다. 희양산 봉암사에서 입적하며 봉암사에 비석이 세워졌으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은 이곳 현등사에 세워졌다. 기록에 따르면 현등사 외에도 평산 연봉사, 강화 정수사, 문경 봉암사에 각각 부도를 조성했다고 하는데 당시 왕실과 현등사의 관계를 말해주듯 현등사의 부도에는 함허당득통(涵虛堂得通)이라는 글씨가 가로로 세긴 몸돌과 왕실에서 주로 쓰인 석등이 함께 놓여 있다.

현등사 삼층석탑

당시 현등사와 왕실의 관계는 ‘현등사는 세종이 신임하던 신미(信眉)가 머물던 곳이니 설정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현등사에서 쌀을 운반해 간 것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알고 있다’라고 ‘문종실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또한 19세기 초까지 ‘위실각(位室閣)’이라는 전각에 세종의 아들 평원대군과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의 위패가 모셔졌었고 지금은 극락전과 지장전에 각각 모셔져 있다. 기록이 아니더라도 현등사 경내 중앙에서 앞의 능선 끝 자연 암반 위 놓인 삼층석탑을 통해서도 그 관계를 알 수 있다. 두 단의 기단에 연꽃과 네모난 액자 모양의 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인 이 탑의 안에서 사리를 넣는 함과 사리가 발견되었는데 사리함 바깥에 1470년 세종대왕의 8남인 영응대군의 장녀 이억천이 아버지의 위패가 모셔진 본 사찰에 크게 시주하여 탑을 다시 지었다는 명문이 있다. 왕실 원당 건립 이후 매우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명문의 내용은 사실 전혀 알 수 없었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이 사리함과 사리는 탑이 도굴되면서 사라졌었기 때문이다. 1980년 경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도굴꾼이 본인이 직접 공범 3명과 유압기를 사용해서 도굴했다고 증언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으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사리함과 사리는 2005년 남양주 봉선사의 도굴품 일제조사 때 비로소 소재가 밝혀졌고 2006년 11월 현등사로 반환되어 현재 경내에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

현등사 경내 2016년 '요사채' 새로 건립

강릉 성씨 총각, 과거합격관련 전설 담아

극락전 右기둥, 영험한 소나무로 제작

안고서 소원 빌면 들어준다는 이야기도

현재도 나무 안고 한참 되뇌는 사람 있어

대선급제사
대선급제사

경내를 둘러보면 2016년 새로 지은 요사채가 있다. 그 뒷면에는 새로 만든 현판이 달려 있는데 그 이름은 ‘대선급제사(大選及第寺)’다. 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영조 때 강원도 강릉에 살았던 성씨(成氏) 총각은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오다가 가평의 현등사(懸燈寺)에 이르렀다. 성씨는 오랫동안 비어 폐사가 되다시피 한 법당 앞에서 지고 다니던 솥에 밥을 짓다가 법당 안의 부처님이 보이므로 미안한 생각이 들어 부처님 앞에 밥 한 그릇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양반 체면에 절을 할 수는 없어 퉁명스레 과거에 합격 시켜 달라 한마디 하고 다시 길에 올랐다. 과거에 낙방한 성씨는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다시 현등사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부처님을 보며 원망하다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금빛 갑옷을 입은 신장이 나타나 무슨 공덕이 있기에 요행을 바라냐며 꾸짖자 가위에 눌려 깨어났고, 도망치듯 고향으로 향했다. 고향집에 도착한 성씨는 아버지께 현등사에서 있었던 일을 아뢰자 아버지는 절을 중수하고 스님을 모신 후 그곳에서 글을 읽으면 과거에 급제할 것이라 하였다. 아버님의 말씀대로 절을 고치고 스님을 모셔 아침저녁으로 함께 예불을 올리면서 3년 동안 글을 읽은 성씨는 마침내 대과(大科)에 급제하였고 나라에서는 그 사연을 듣고 ‘대선급제사(大選及第寺)’라는 편액을 보냈다.

소원을 들어주는 극락전 기둥
소원을 들어주는 극락전 기둥

또 다른 이야기로는 현등사 극락전 오른쪽 기둥은 영험한 나무로 만들어져 진심을 다해 나무를 붙잡고 기원을 하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이 두 이야기가 합쳐져 한아름으로 안을 수 없을 만큼 큰 극락전의 기둥을 끌어안고 한참을 속으로 되뇌는 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실의 여부가 아닌 믿음과 간절함의 여부이기에, 나도 밝힐 수 없는 소원을 핑계 삼아 기둥을 다시 한 번 안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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