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에 남도 여행을 떠나본다. 그것도 꽃피고 새우는 신록의 봄 사월에. 지인은 나와의 동행을 위해 멋진 승용차를 아파트 입구에 놓아주었다. 타인과의 여행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참 조심스럽다. 사실 그 지인이 사돈이니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설렘 반 우려 반 이미 떠난 여행이니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사실 평소에도 가끔 산행을 함께 해 왔고 식사 자리도 빈번한 터라 서로를 대부분 알고 이해하는 사이이니 특별할 건 없다. 그래도 2박3일간의 동행은 다를 수 있다. 여행을 해 봐야 상대를 알 수 있다고 했듯이 온종일 함께 있으면 볼 것 안 볼 것 모든 것을 다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황사가 그리운 먼 소식처럼 흐릿하게 덮여 있다. 남도라는 이상적 관념뿐 세세한 목적지가 없는 여행은 섬진강 길로 들어섰다. 벚꽃이 지고 난 길은 가끔 햇살이 강물에 지나치고 윤슬도 이루었다.

처음 들린 곳은 천은사이다. 화엄사와 쌍계사를 매번 보기보다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천은사를 택한 건 잘한 것 같다. 조선 4대 명필이라는 이광사의 현란한 글씨를 일주문 현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계곡의 맑은 물과 좌우 산자락의 신록을 보는 것만 해도 마음의 때를 정화하기에 충분했다.

점심을 먹으려고 들린 구례의 식당들은 대부분 긴 줄을 선 관광객으로 인해 포기해야 했다. 결국 화개장터까지 밀려가서 재첩국 한 그릇에 참게탕까지 맛볼 수 있었다. 시끌벅적한 화개장터를 한 바퀴 돌고 순천으로 넘어갔다.

붐비는 정원박람회를 지나 순천만 갈대숲을 전망대까지 올라가서 보았다. 물길 멀리 아련하게 비친 낙조가 아름다웠다. 인물 자랑 말라는 순천에서 조용히 저녁을 먹는다. 꼬막 정식에 짱뚱어탕까지, 밥 한 공기 추가해서 비워냈다. 남도의 음식을 제대로 먹은 기분이다.

길가의 청보리밭이 너무나 싱그럽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라고 했던 박목월의 나그네처럼 이정표는 녹차의 고을 보성으로 이어졌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하룻밤 묵는다. 호텔에서 맥주 한잔을 나눠 비우고 깔끔한 침대에서 조용히 각자의 꿈속으로 들었다.

이튿날 아침, 이 호텔의 스파숍으로 들었다. 따뜻한 해수의 부드러운 온기가 온몸에 스며든다. 사돈과 함께 옷 벗은 원시인으로 돌아가니 계급장 뗀 군인처럼 이것저것 따질 것 없는 친근감이 든다. 정갈한 심신으로 해변의 한 식당에 마주 앉아 장어탕을 먹었다. 원기가 솟는 기분이다.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는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읽혀준 영랑의 모란꽃밭을 지나쳐 보성의 녹차밭으로 향했다. 석 잠을 자고 난 거대한 누에처럼 꿈틀대는 산자락 녹차 이랑을 걸으며 싱그러운 다 향에 취해본다. 메타세쿼이아 숲길도 좋고 이곳에서 마신 녹차 한잔도 은은히 후각을 자극했다. 굽이굽이 이어진 녹차밭, 참으로 보성은 녹차를 매개로 한 녹차의 절대 본향이 분명했다.

한우 육회와 싱싱한 생고기를 맛볼 수 있는 장흥 한우 시장은 입구부터 붐볐다. 이곳에서 나는 그만 사돈 선생의 과도한 친절에 평소의 식문화를 벗어나는 과식을 했다. 소화기관이 부글부글 끓는 불편을 가져왔다. 목포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중종이 사약을 내렸던 조광조의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흐른 동시대의 상황을 끄집어냈다. 물론 나를 젖히고 몰래 경비를 내는 사돈의 일방적 횡포를 우회적으로 내비친 조용한 저항이기도 하다.

차는 다시 대흥사를 품고 있는 두륜산으로 치닫는다. 그곳은 나에게 또 어떤 마음의 이랑을 넓혀 줄 것인가. 봄 날씨보다 변화무쌍한 게 사람의 욕망이라지만 기대는 늘 진전된 상상의 창의력을 생성한다.

이해균 화가, 해움미술관 대표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