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22>

안시성 소재지 해성과 그 성안의 ‘파두가’
임조영씨의 말에 따르면 해성현성은 옛날에는 사안성(四安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사안성이란 지명은 사서에 없다.
해성 지역은 머나먼 옛날에는 바다였다고 한다. 후에 지질구조의 변화로 말미암아 이곳의 지각이 점차 상승하여 육지로 변해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해성은 옛날 임명(臨溟), 해주(海州)라고도 불렀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이곳이 남북조 시기에는 고구려에 속했고, 당조 시기에는 안동도호부에 속했다가 후에 발해국에 속했다. 요(遼)나라 때는 해주남해군(海州南海軍)에, 금(金)나라 때에는 등주남해군(登州南海軍)에, 원(元)나라 때는 요양로(遼陽路)에, 명(明)나라 때는 해주위(海州衛)에 속했다가 청(淸)나라 때에는 해성현(海城縣)으로 고쳤으며, 요양부에 속했다가 봉천부(奉天府)에 귀속되었다.
고구려 시기 해성(평지성)은 안시성과 같은 토성이었고, 후에 명나라 홍무(洪武) 9년에 벽돌로 개축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3장4척(장<丈>과 척<尺>, 중국 길이의 기준, 과거와 현재의 기준 수치가 다르다. 현재 1척은 33.3cm)이었고, 동서남북에 각각 성문이 하나씩 있었다. 그중 동문은 진무문(鎭武門), 남문은 광위문(廣威門), 서문은 임청문(臨淸門), 북문은 내원문(來遠門)이라 불렀고, 성 밖에 해자가 있었는데 깊이 1장1척에 너비는 3장5척이었다. 현재 성벽터는 흔적도 없고 성벽 터를 따라 도로가 나있을 뿐이다.
그리 크지 않은 옛 현성은 정방형으로 동서남북의 길이가 각각 1리(지금 중국에서 1리는 500m)다. 동쪽으로 환성동로(環城東路), 서쪽으로 환성서로(環城西路), 남쪽으로 환성남로(環城南路), 북쪽으로 환성북로(環城北路)가 각각 옛 성벽 터를 타고 나 있다.
현성 중간에는 동서로 삼의가(三義街)가 있으며 이와 나란히 북쪽에 파두가(파頭街)라고 하는 거리가 이웃해 있다. 파두가의 명칭은 제1차 여당전쟁 시기 당태종의 군이 고구려 안시성을 공격할 때 이곳에서 일어난 역사일화에서 생겨난 것이다.
임조영이 들려준 설화에 의하면 당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안시성 싸움을 벌이기 전에 먼저 해성을 치다가 고구려군의 공성계에 휘말려 고구려군이 둘러싸인 해성 성 안에 갇혀 있을 때, 위지경덕의 부장이던 장사귀가 역모를 꾀하여 장안으로 돌아가 군사를 청구했다 한다. 당시 장안에서는 태자 이치(李治·훗날의 고종)가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공을 탐한 장사귀는 사위 하종헌(何宗憲)과 함께 당 태종이 지원병을 요구한다는 거짓말을 꾸며대어 군사를 꾀어내었지만 후에 발각되어 장안 밖에서 잡힌다.
당 태종이 해성에서 구출된 후 당왕의 부마이며 설인귀(원래 장사귀의 휘하 조리꾼이었음)의 휘하 장수인 진회옥(秦懷玉)은 장사귀를 해성으로 끌고 가 참수하여 성문에 효시했다. 당시 장사귀를 참수했다는 곳이 바로 이 파두가 서문 밖이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고택 한 채가 남아있는데, 이는 청나라 때 지어진 것으로 산동지역에서 이주해온 동향민들이 모여서 회포를 나누는 ‘산동회관(山東會館)’이다. 이곳이 바로 당년의 사형장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장사귀는 해성 복판에서 당 태종 앞에 무릎을 꿇리어 문죄를 당한 후 참수령을 받아 사형장까지 기어가서 참수를 당했다고 한다. 파두가는 바로 장사귀가 사형장까지 기어가서 참수를 당했다는 뜻으로 지어진 거리명칭이다.
장사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엇갈린 평가가 나온다. 중국 국내 많은 민간소설에 나오는 장사귀는 설인귀를 음해하는 간신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의 사위 하종헌이 설인귀의 공로를 가로챈 일은 확실히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사귀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부동한 설이 있다.
해성 성벽은 1944년 일본군이 이곳을 점령하였을 때 허물어버려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해성 지역에는 위에서 언급된 여러 산성 외에도 여당전쟁 시기의 유적지와 그 전·후기의 역사 유적과 유물들이 매우 많다. 예를 들면 석목성(析木城) 고인돌 무덤은 해성 동남쪽 17km 지점 석목진(析木鎭) 고수석촌(姑嫂石村) 남산에 있다. 고인돌은 여섯 개의 다듬은 화강암으로 축조되었는데 한 개는 바닥에 깔고, 세 개는 기둥으로 세웠으며, 한 개는 지붕으로 삼고, 한 개는 남문으로 절반을 막아놓은 반쪽 문으로 쓰였다. 고인돌의 높이는 약 2.7m, 지붕돌은 길이 약 6m, 너비 5m, 두께 0.5m로 무게가 수십t에 달한다. 고인돌은 원래 산 아래위에 각각 1기가 있었는데, 위의 것은 수석(嫂石)이라 하고 아래 것은 고석(姑石)이라 하였다. 현재 수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고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석목성 고인돌은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 초기에 형성된 것으로, 중요한 역사적, 고고학적 가치를 갖고 있다. 1963년 요령성 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된 이 고인돌유적은 2001년에는 전국 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승격되었다.
또 해성시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는 원래 개소둔(蓋蘇屯)이라 불리던 경장진(耿莊鎭) 경장촌은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살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여러 여당전쟁 일화에도 개소둔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해성시 북쪽 약 20km 지점인 감천진(甘泉鎭) 관반사촌(管飯寺村)에는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 시 사용했다고 전하는 커다란 돌솥이 있는데 쌀 1석2두를 담을 수 있을 만큼 크다고 한다.
이외에도 해성시 지역 내에는 청나라 강희(康熙) 21년(서기 1682년)에 세워졌다는 관제묘(關帝廟), 명나라 때 지어졌다는 삼학사(三學寺) 등 고찰이 있고 탕강자(湯崗子)온천 등 유명한 관광휴양지가 있다.
해성시의 총 면적은 2천734㎢, 인구는 113만으로 요령성에서 가장 큰 현급 시에 속한다. 해성에는 지하자원도 많다. 마그네사이트 매장량은 전 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활석의 매장량도 전 세계에서 으뜸으로 꼽혀 ‘마그네사이트의 도시’, ‘활석의 고장’이라 불린다. 해성은 산간지역, 평원, 구릉, 습지 등 여러 가지 지형이 있고 기후가 따뜻하여 곡식, 과일, 야채, 목축업 생산기지로 유명하다. 또 도시와 농촌의 중소기업이 발달하여 여러 가지 제품의 생산기지이기도 하다.
해성시는 ‘시장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에서 가장 큰 의류시장에 속하는 서류(西柳)의류시장이 해성에 있고, 전국에서 가장 큰 남대(南臺)가방시장, 전국에서 가장 큰 감왕(感王)보석시장 등을 비롯하여 각종 전문, 복합 시장 100여 곳이 있어 시장 종업원이 해성시 전체 노동력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해성시 인구당 수입의 30%가 시장에 의존하며 재정수입의 30%가 시장에서 나온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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