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36>

 청룡산산성은 6개의 산마루를 성벽으로 연결해 이루어졌으며 남쪽이 높고 북쪽은 낮다.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는 산성 둘레의 길이는 2천213m다. 성벽은 흙과 잔돌을 섞어서 산성 주변의 등성이 위에 다져 쌓았다. 등성이 사이에 낮은 곳은 인공으로 메우고 성벽으로 이었으며 기복이 심하지 않아 성벽 높낮이가 거의 비슷하다.
동쪽 성벽은 산성 사면 성벽 중에서 가장 험준한 곳에 있다. 이 성벽은 성 안 동쪽 골짜기 바깥쪽 청룡산 벼랑 위에 축조되어 있는데, 그 동쪽에서 흘러내려오는 범하강이 벼랑 밑에서 굽이돌아 북쪽으로 흐르다가 몇 리 밖의 백호령 아래에서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므로 동쪽에서 이 산성을 쳐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벼랑 위에 서면 강 너머 동북쪽으로 장루자마을이 바라보인다. 장루자마을 쪽으로 향하는 돌다리가 금년 장마철 홍수에 밀려 흉물스럽게 강 복판에 쓰러져 있는 것이 내려다보였다. 장씨는 장루자마을에서 서남쪽으로 이 벼랑을 향해 바라보면 하나로 이어진 산체가 마치 한 마리의 청룡이 누워있는 모습 같다고 하여 이 산을 청룡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보존상태가 비교적 괜찮은 성벽은 서쪽 성벽이다. 이 성벽은 호로곡 서쪽 산등성이를 따라 남북으로 쌓았는데 중간쯤에 성문터를 두고 두 토막으로 나누어진다. 한 토막은 이 문터에서 남쪽으로 나가다가 산성에서 가장 높은 서남쪽 산등성이에 이르러 동쪽으로 꺾어져 남벽과 이어진다. 다른 한 토막은 문터에서 북으로 내려오다가 서북쪽 산등성이에서 동쪽으로 꺾어져 산성 북벽과 만난다.
서쪽과 남쪽 성벽의 어떤 구간은 옛 흔적이 뚜렷하다. 현재 남아 있는 이 산성의 성벽은 밑바닥 너비가 약 8m 된다. 성벽 안쪽으로는 성 안 주둔군이 상호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마도(馬道)가 성벽을 따라 조성되어 있다. 이 마도에는 자갈들이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길을 깔기 위해 성 밖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산성의 문터는 세 곳으로서 남문, 북문, 서문이 나있다. 남문은 산성 동남쪽 산봉우리에서 남벽을 따라 118m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다. 남문 밖의 통로 또한 양측에 아주 높고 좁은 협곡처럼 되어 있어 남문으로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을 법 했다.
북문은 산성의 정문으로, 북쪽 성벽의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서북쪽 성벽 모퉁이와 83m 사이에 두고 있는 북문 터의 성벽높이는 약 10m이며 성문이 옹성구조로 되어 있는데 서쪽에서 마주오는 성벽과 엇갈리게 나 있어 밖에서 얼핏 보기에는 성문이 있는지 몰라볼 정도로 교묘하게 설치되어 있다. 그러니까 북문으로 해서 산성을 들어오려면 우선 저수지를 에돌아야 하고 S자형 오솔길을 돌아 옹성문을 거쳐야만 하므로 성문을 접근하는 일 자체가 어려워 보였다.
서문은 곧바로 뻗은 두 토막의 서쪽 성벽이 136m 되는 등성이에서 교차되는 지점에 설치되었다. 서쪽 성벽의 북쪽 토막은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내뻗고, 남쪽 토막은 여기까지 와서 딱 끊어져 있어 문터의 길은 서남쪽으로 기울어진 서벽 북쪽토막 옹성벽 같은 남단을 에돌아야만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놓았다.
산성에는 배수시설도 있다. 북문에서 동쪽으로 약 30m를 사이에 두고 성벽 한 토막이 잘라져나간 게 눈에 뜨인다. 장씨의 말로는 요즘 한동안의 집중호우로 성안에 물이 차면서 이곳 성벽이 터져 이 물길이 생겼다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성안 옥수수 밭은 물에 잠겼던 흔적이 역력했다. 터진 곳을 자세히 살펴보니 터진 벽 단면은 수직으로 되어 있다. 다져쌓은 성벽의 속살이 드러난 것이다. 이 터진 물길의 바깥쪽은 바로 저수지(권호)였다. 이곳이 바로 옛 성벽의 배수구 자리였다. 이곳은 북쪽 성벽에서도 가장 지세가 낮아서 배수구로 적격이다. 다만, 그 배수구는 땅속에 묻혀 기나긴 세월 속에서 조용히 버티고 있다가 금년과 같은 산사태를 이기지 못해 터졌을 뿐이다. 산성 남문 옆으로도 이와 비슷한 곳이 있으니 거기도 성벽 밑으로 난 배수구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은 무너진 토성에 묻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이 산성에 대한 고고학 발굴을 한다면 그 배수구를 꼭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청룡산산성 안은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여 산중에 있지만 성 바깥 평지에 비해 10여m밖에 높지 않아 평지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필자가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고구려유적 답사기행문》의 ‘요북 최대 성 최진보산성’ 편에서 언급했다시피 청룡산산성은 가까이 떨어져 있는 최진보산성의 평지성이자 수비성으로서, 평소에는 고구려인이 여기서 농사를 짓고 지키다가 전쟁 때는 최진보산성과 서로 호응하여 협동작전을 하는 수비성의 방어시설은 제대로 갖추고 있다.
청룡산산성에는 전망대가 모두 7개 있다. 그중 6개는 성벽에 있고 1개는 남문 바깥에 설치됐다. 성벽에 설치한 6개 전망대 가운데 4개는 성벽 모퉁이에 분포되었고, 2개는 동쪽성벽에 설치해 놓았다. 이런 전망대는 단순하게 적의 동정만 살펴보는 시설이 아니라 적들이 쳐들어올 무렵 그들에게 공격도 가할 수 있는 각대(角臺)처럼 만들어 놓았다.
성 안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장대 터다. 산성 동북쪽 산등성이에 위치한 이 장대 터는 둥그스름하고 불룩한 커다란 언덕인데 범하 강변의 아찔한 벼랑을 등지고 서남쪽으로 완만한 기복을 이룬 확 트인 동성 안과 산성을 남북으로 가로지른 등성이, 그리고 그 너머 서벽이 쌓여있는 산등성이를 굽어보면서 우뚝 솟아있다. 동성 골짜기에서 이 장대 터를 바라보노라니 그 모습이 필자로 하여금 저절로 컴퓨터 바탕화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 폭의 자연풍경, 즉 흰 구름 떠있는 청청한 하늘 아래 무연히 펼쳐진 초원 속에 봉긋 솟아오른 푸르른 언덕을 연상케 했다. 옛날에 고구려 장군들이 이 장대에서 싸움을 지휘하며 군사들을 호령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장대 터는 지금 봐도 그 지세가 범상치 않고 위엄(威嚴)이 있어 보인다. 아마 옛날 장군들의 기백이 아직까지 서려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이 산성에는 봉화대도 있다. 산성 서북쪽 전망대에서 성벽이 동으로 내려오다 북으로 부죽이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와 북문과 만나는데 이것이 바로 산성북벽 서쪽 토막이다. 이 토막 성벽이 부죽이 나간 산등성이(북문 앞 서북쪽)에 산성의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다.
성 안의 건축유적은 주로 동쪽 성에 분포되어 있다. 현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옛날 이곳에는 붉은줄무늬기와조각들이 숱하게 널려 있었으며 쇠가마, 쇠보습날, 쇠칼, 말등자, 철촉 및 구리거울 등 철기유물이 출토되었다 한다. 북문에서 배수구에 이르는 사이에서도 오래전에 약 2m 길이의 석판을 파낸 적이 있다고 장씨가 말하는데 아마 무덤이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장씨는 성벽 동북쪽 모퉁이에서 남으로 조금 더 나아가 등성이가 끝나는 비탈 아래 옛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산 속의 옛 사찰이 영험해서 관내(關內: 산해관 서쪽 지역)에서도 알아준다고 하였다. 그도 어릴 적에 그 사찰을 보았는데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허물어버렸다고 한다. 또 그 옆에는 돌로 쌓은 고구려시기의 오래된 우물이 있었고 용왕을 가두어놓았다고 하는 굵은 쇠사슬이 그 안에 드리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언젠가 다 묻혀서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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