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39>

수·당 두 나라 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혈전터
옛날 교통과 전략 요충지이자 큰 도시인 요동성은 그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전쟁 때마다 큰 공격을 당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 그러했다. 그 때 여기서는 세 번이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첫 번째는 612년 2차 고·수전쟁 시기다. 요하강을 건넌 수나라 대군은 곧바로 요동성으로 진군하여 그해 4월 하순부터 요동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양제는 요동성 남쪽에 둘레의 길이가 120보(步)되는 야전(野戰)에서 기병부대의 기습공격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어용 조립식 영채(營寨) 육합성(六合城: 그 당시 새로 개발한 것)을 세우고 거기서 전군을 지휘하였다. 그는 요동성을 함락한 뒤 요동 전 지역을 휩쓰는 대 고구려전에서 가장 유리한 거점을 먼저 점령하자는 심산이었다. 수나라 군은 여러 가지 공성(攻城) 신무기를 작전에 투입시켰다. 그들은 성벽 여러 곳에 운제(雲梯)를 걸쳐놓고 성안을 감시하면서 발석차로 돌을 날려 보내는가 하면, 충차(衝車)와 화차(火車)로 성문과 성벽을 파괴하거나 소각시키는 작전을 벌였다.
수적인 면에서 수나라군에 비교할 바가 안 되는 요동성 안의 고구려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경계태세를 강화하는 수성(守城) 전술을 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적에 대응하여 철질려(鐵질藜·마름쇠)를 성벽 주위에 매설해 두어 수나라군이 성벽으로 함부로 접근 못하도록 하였으며, 이미 접근해 온 적들의 선두대열은 성벽 밑에서 철질려에 걸려들어 많은 부상자를 내자 그들의 공성무기인 충차와 화차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고구려군은 또 성 밑으로 공격해 오는 적진에 돌멩이를 날려 보내어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포차(砲車)를 성벽 위와 성안 여러 곳에 배치해 놓고 적들에게 투석과 궁시(弓矢) 공격을 진행하여 그들을 사상했다.
수나라군은 6월 초순까지 이렇게 수차례 공격을 반복하였지만 사상자만 불어났지 아무런 진척도 없이 시일만 지연되었다. 그 동안 요동성의 고구려 군사들은 성안의 백성들과 똘똘 뭉쳐 수나라 군대의 포위공격에 굳건히 무력으로 맞서 대응하는 한편 융통성 있고 유연하게 거짓으로 적을 속여 그들의 전의(戰意)를 약화시키는 책략을 취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수나라군의 공격이 심하여 성의 수비가 위태로워질 때 수나라 진영에 거짓으로 항복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그 공격을 완화시켰다. 그리고 일단 적들의 공격이 완화되면 고구려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재빨리 전열을 정비하고 무너진 성벽을 복구하며 방어태세를 한층 강화하였으며 적들의 경계태세가 해이해진 틈을 타거나 야음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기습공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술책은 요동성을 오래 지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반면에 고구려군의 술책에 말려들어 요동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여러 번 놓치게 된 수나라군은 시일을 끌수록 사기가 떨어져 성을 함락시킬 가능성이 갈수록 희박해졌다.
이렇게 되자 2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고착상태를 해소할 수가 없었던 수양제는 새로운 책략을 모색하였다. 그는 요동성에 대한 공격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고 30만명의 정예 별동부대를 파견하여 먼저 공격에 나선 수로군과 함께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진격하여 평양성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 수로군과 별동대도 선후하여 평양 부근 전투와 살수전투에서 모두 고구려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수나라 수로군과 별동부대의 참담한 패배에 충격을 받은 수양제는 그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리고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는 군사들을 포함한 전군에 철군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고구려는 100만이 넘는 수나라 원정군을 격퇴하여 2차 고·수전쟁의 승리를 거두었다.
두 번째는 613년 3차 고·수전쟁 시기다. 이해 5월 수나라 대군은 요동성을 완전히 포위한 다음 공세를 가하여 단기간 내에 성을 함락하고자 전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다양한 공성기구들을 동원하여 2차 전쟁 때 요동성을 공격하던 같은 방법을 썼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성기구인 비루(飛樓)를 성 외곽의 여러 곳에 배치하여 고구려의 수성(守城) 태세를 수시로 지켜보면서 상황변화에 따라 알맞게 공격방법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또 땅굴을 파는 장비를 투입하여 비밀리에 침투조를 성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한 땅굴을 파기도 하였다. 수나라군은 이렇게 공중, 지상(地上), 지하(地下) 입체적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수나라와 제2차 전쟁에서 무려 3개월에 걸친 장기간의 수성작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했던 요동성 고구려 군민들은 그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치열한 접전을 거듭하면서 잘 버텨나갔다. 수양제는 전투 현장에 와서 선전(善戰)을 독려하기까지 하였으나 6월이 되도록 요동성이 함락되지 아니하자, 수많은 군사들을 시켜 흙을 채운 포대(布袋)로 쌓아올린 임시성루(城壘) 어량대도(魚梁大道: 너비가 30여 보, 높이가 성벽보다 조금 더 높은 고기등처럼 생긴 길쭉한 담벽)를 성벽과 수직되게 축조하였다. 그리고 좌우 양측에 4개의 바퀴를 단 이동식 고가사다리차인 팔륜누거(八輪樓車)를 어량대도 양측에 배치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어량대도에 오른 군사들에게 성 안을 내려다보며 공격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바야흐로 더 치열한 공방전이 닥쳐오는 분위기 속에서 장기간의 수성 작전에 심신이 지친 고구려군민들은 큰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때에 수양제는 국내에서 예부상서(禮部尙書)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이 일어나 점차 확산되고 있다는 급보를 받게 되었는데 또 측근에서 요동성 공성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수군진영을 탈출하여 요동성의 고구려군 측에 투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수양제와 수나라군의 수뇌부는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어량대도에 의한 요동성 공격작전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항전의 결의가 잠시나마 침체되었던 요동성의 군민들은 곡사정의 망명을 계기로 결전의 의지를 가다듬고 수성태세를 재정비하며 수나라군을 격퇴하려고 다짐하고 있었다. 이럴 때, 은밀히 철군하라는 수양제의 명령을 받은 수나라 대군은 요동성을 포기하고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하여 제작한 제반 공성무기와 장비, 그리고 대량의 군수품을 내버린 채 야음을 타서 황급히 철군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요동성을 지키는 데 또 한 번 성공하였다.
세 번째는 당나라 정관(貞觀) 19년(기원 645년) 1차 고·당전쟁 시기다. 당나라의 주력군이 요동성에 이를 무렵, 고구려에서 요동성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4만 군사들이 도착했다. 고구려정벌 육로군 전로(前路) 부총관(副總官) 강하군왕(江夏郡王) 이도종(李道宗)은 먼저 기병 4천명만 거느리고 맞받아 나갔다. 이에 수하 장수들이 극구 만류했다. “적들은 우리의 10배나 많은 병력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당해내려고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골짜기를 파고 성벽을 쌓아 황제(이세민)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도종이 말했다. “적들은 숫자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경시하고 있다. 저들이 양적으로는 많다고 하나 멀리서 쫓아오느라 피곤했을 테니 이때 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선봉군이 아니냐. 길을 치워 황제가 오는 것을 기다려야 할 것인즉 어찌 적들을 황제에게 남겨둘 수 있겠는가.” 고구려정벌 육로군 전로(前路) 부총관(副總官)이며 주장(主將)인 이적(李績)도 이도종의 의견을 지지했다.
고구려군이 도착하자 과의도위(果毅都尉) 마문거(馬文擧)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며 이도종에게 말했다. “강한 적과 싸우지 않고 어찌 장수의 용맹을 떨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나서보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필마단기로 고구려 진영을 향해 달려갔다. 마문거의 필사적인 싸움으로 당나라군의 사기는 충천했다. 고구려군과 당나라군이 재차 진영을 마주했을 때 행군총관 장군의(張君義)가 겁을 먹은 채 군사를 이끌고 도망치자 고구려군이 쳐들어 와 당나라군은 혼란에 빠진 채 뿔뿔이 흩어졌다. 이도종이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높은 곳에 올라서 보니 고구려군의 진형도 흐트러지고 있는지라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그리로 돌격해 들어갔다. 이때 이적도 지원군을 거느리고 와 싸움을 돕자 고구려군은 천여 급의 수급을 남긴 채 패하였다.
이해 5월 10일, 육로군 후로(後路) 주력군을 이끌며 온 당태종은 요하를 건너 요동성에 이르자 마수산(馬首山: 현재 요양시 서남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는 首山)에 진을 쳤다. 여기서 태종은 이도종의 공로를 치하하고 고구려군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마문거를 중랑장(中郞將)으로 진급시켰으며 진을 버리고 도망친 장군의는 참형에 처했다.
당태종은 요동성 공략작전을 직접 배치하였다. 그는 이적, 장검(張劍)에게 명하여 정예군과 유목민으로 이루어진 병력을 거느리고 요동성의 남쪽을 공격하게 하고, 이도종과 장사귀(張士貴)에게 명하여 관중(關中)의 정예병을 이끌고 요동성의 서쪽을 공격하게 하였으며, 선봉군 대총관 유홍기(劉弘基)에게는 성벽 아래의 해자를 메우게 하였다. 이적이 거느리는 군사들이 밤낮으로 열이틀이나 공격했지만 요동성은 좀처럼 공략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5월 17일, 당태종은 1만여명의 기병을 데리고 요동성 아래에 와 이적의 군사들과 함께 공성(攻城)작전을 벌이고 전방에서 싸움을 독려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남풍이 크게 불어치는 것이었다. 태종은 정예부대를 파견하여 긴 장대(막대기)를 타고 올라가 성 안으로 불화살을 쏘게 했다. 그러자 서남쪽 누각에 불이 붙었다. 성안에는 목조건물에 초가이엉을 한 집이 많은데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성안은 삽시간에 불이 번져 불바다가 되었다. 이때 당나라 군사들이 성벽을 기어올라 공격을 가했고 고구려군은 죽기 살기로 맞받아 싸웠다. 태종은 군사들을 명령해 충격차로 성벽 한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게 하여 그곳의 성벽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당나라군이 그쪽으로 벌떼처럼 쓸어 들어갔다. 이리하여 요동성은 함락되고 당나라군 손에 넘어갔다. 당나라 군사들이 요동성을 포위공격하고 있는 동안 당태종은 유명한 ‘요성망월(遼城望月)’의 시를 썼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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