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41>

큰 전략거점의 수호성 백암성
백애성(白崖城)이라고도 부르는 요양(遼陽)지역의 연주성(燕州城)은 고구려의 백암성(白岩城)을 말한다. 백암성은 현재 요양 등탑시(燈塔市) 서대요향(西大窯鄕) 성문구촌(城門口村: 연주성촌<燕州城村>이라고도 함) 동산(東山)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산성은 동진(東晉) 원흥(元興) 2년(서기 403년),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차지한 후에 축조된 것이다. 백암성은 요동성에서 평양으로 가는 옛 길 낙랑도(樂浪道: 평양도<平壤道>라고도 함)를 따라 태자하 상류지역의 고구려성으로 가거나 천산산맥 건너편 평양성 전진로의 오골성, 안평성, 박작성으로 가는 길목, 그리고 북쪽으로 요동성에서 신성이나 부여성을 거쳐 국내성으로 가는 옛 길에 들어설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은 고구려의 중요한 군사요충지로서 요동성, 오골성, 신성 등 고구려의 큰 전력거점을 지켜주는 수호성이기도 하다.

수나라 때 지켜왔던 산성, 당나라 때 비운으로 함락
백암성은 고·수전쟁과 고·당전쟁의 시련을 겪은 산성이다. 2차 고·수전쟁 시기, 수양제는 주력군으로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게 하는 한편 요동에서 별동대를 파견하여 평양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남아있는 역사기록에는 없지만 그때 별동대의 진격로에 위치하고 있는 백암성은 수나라군과의 접전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그때 거기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당 정관(貞觀) 19년(서기 645년) 5월 28일, 당 태종이 거느린 당나라군은 요동성을 함락한 여세를 몰아 요동성에서 제일 가까운 백암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백암성은 성벽이 높고 견고하며 산세까지 험해 난공이수다. 게다가 성 안에 군사들도 적지 않고, 무기, 식량과 마초도 충분하게 비축되어 있어 쳐들어가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당나라 여러 장수들이 선후로 이 성을 공략하고 지원군을 차단하는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이에 앞서 요동성이 함락되자 연개소문은 오골성(현재 단동<丹東>시의 봉황산산성)의 군사를 보내어 백암성을 지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1만여 명의 고구려 지원군이 백암성 외곽에 이르렀을 때 맞받아 나온 당나라 장수 계필하력(契苾何力)이 거느린 800명의 기병과 먼저 부딪치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고구려진영에 쳐들어가던 계필하력은 고구려지원군 장수 고돌발(高突勃)의 창에 옆구리가 찔려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고구려지원군은 격전을 거쳐 입성에 성공하게 된다. 전하기로는, 그 당시 당태종의 시위(侍衛)인 설만비(薛萬備)에 의해 목숨을 건진 계필하력은 대강 상처를 싸맨 뒤 또 죽기 살기로 고구려 지원병과 싸웠다고 한다. 사후의 일이지만 백암성이 함락된 후, 당 태종은 고구려 포로들 가운데서 고돌발을 찾아내어 계필하력 보고 마음대로 처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돌발의 용맹과 애국심에 감복한 계필하력은 “신은 고돌발과 얼굴도 모르고 원한도 없습니다. 변강 전장에서 싸우는 것은 주군을 위한 것입니다. 고돌발 또한 자신의 주군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신을 죽이려 하였으니 이는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신하입니다”라고 말하며 고돌발을 놓아주었다고 한다.
한편 애초에 요동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은밀히 당나라군과 내통하여 항복을 시도하던 백암성 성주 손대음(孫代音)은 오골성에서 지원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항복하는 일을 잠시 멈추었다. 이에 크게 노한 당태종은 군사들에게 ‘성을 함락하는 대로 노획한 물품과 사람은 모두 군사들에게 주겠다’고 명을 내리며 공성작전을 다그치도록 하였다. 그러자 사기가 오른 당나라군의 공격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세적이 거느린 군사들은 백암성 서남쪽을 맹렬하게 공격했고, 당태종이 직접 이끄는 군사들은 성 서북쪽을 사납게 공격했다. 다급해진 손대음은 남몰래 측근을 성 밖으로 보내어 당나라군에게 빨리 항복을 받아달라고 하며 당나라 군사들이 성 밑에 이르면 칼을 던지는 것으로 항복하는 신표로 하자고 하였다. 그러자 당 태종은 당나라군의 기를 그 손대음의 측근에게 건네주며 ‘만약 확실히 항복하려면 이 기를 내걸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때 그 기미를 알아차린 당나라의 장수들이 반대해 나섰다. 손대음의 항복을 정말 받아들인다면 백암성을 공격하는 데 힘을 들인 그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이세적이 여러 장수들을 데리고 태종에게 간하였다. “장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노획물을 많이 얻기 위함입니다. 지금 성을 곧 함락하려는데 저들의 항복을 받아들인다니 어찌 장졸들의 마음이 서늘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태종은 말에서 내려 사과의 뜻을 내비치며 이렇게 말하였다.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저들(고구려인)을 죽이고 그들의 처자권속을 빼앗는 것은 짐이 차마 할 짓이 아니니 장군의 수하들이 공을 세운다면 짐이 우리 창고에 놔둔 물품을 풀어서 큰상을 내릴 것이요.”… 이리하여 당태종은 장졸들의 불만을 가라앉히었다고 한다.
약속한 날이 되자 손대음은 사전의 약정대로 당나라군의 기를 성가퀴에 꽂았다. 성안의 적지 않은 장졸과 백성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당나라 군사들이 이미 성을 차지한 줄로 착각하고 손대음이 하자는 대로 따르다보니 때가 그만 늦어버렸다. 이리하여 당나라군은 백암성을 함락하고 남녀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태종은 성문 앞 태자하 기슭에 천막을 치고 손대음의 항복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현재 요양지역에서는 그 당시 백암성을 다른 방법으로 공략했다는 설화도 있다. 이 설화에 의하면 당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을 함락한 후 뒤미처 백암성을 공격했지만 일시적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화공법으로 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들은 숱한 참새를 잡아다 불이 잘 붙는 인(燐) 조각을 달아 성안으로 날려 보낸 후 밤이 되자 불화살을 성안으로 쏘았다. 그러자 성안에 불이 붙어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현지에서 전해지는 “참새가 연주를 격파”한 이야기다.
사실인지는 잘 모르나 당태종은 함락된 백암성에서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고 80세 이상 노인들에게는 비단을 주었으며 이 성에 오게 된 타 지역 고구려 군사들에게는 노자를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당 태종은 백암성을 백암주성(白岩州城)으로 고치고 손대음을 백암주자사(刺史)로 임명했으며 그에게 중대부(中大夫)와 상경차도위(上輕車都尉)의 벼슬을 수여하고 비단 백 필과 말 한 필, 의관과 금띠를 하사했다고 한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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