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57>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 이 두 나라는 선후로 10차례나 고구려를 정벌했다. 그 진공 노선이 모두 같지는 않지만 대부분 요택지대(요하와 그 인근 지역도 포함)를 가로 건너거나 멀리 돌아서 요동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므로 당시 고구려의 서부변경에 속하는 이 지대에서 고구려군과의 접전은 불가피했다. 필자는 그때 이런 접전이 여러 번 벌어졌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서나 관련 자료에는 그것이 두 번만 기록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한번은 제2차 고·수(高隋)전쟁 시기, 기원 612년 3월에 벌어진 요하전투이다. 자료에는 이렇게 그 전투를 서술하였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직접 원정군을 거느리고 612년 3월에 요서 회원진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에서 요하로 진출한 고구려군은 요하 동안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수나라군은 고구려군의 방어선 전면(前面)을 우회하여 요하 하류지역으로 일부 병력을 은밀히 이동시켜 그곳에서 불시에 도하작전을 하여 대안(對岸)에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수양제는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하요하 남쪽 구역에다 부교를 빨리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 그 지역의 3곳에 부교 가설준비가 완료되었다. 그러자 수양제는 좌군의 제1군 총사령관인 우둔위(右屯衛) 대장군 맥철장(麥鐵杖)과 호분랑장(虎賁郞將) 전사웅(錢士雄)의 부대로 하여금 도하작전을 진행하도록 명령하였다. 수나라군은 준비된 부교를 강물 위로 연결시켜 강동 쪽 대안으로 접안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준비한 부교는 1장 정도나 길이가 짧아서 상륙 예정지점에 접안할 수가 없었다. 고구려군은 수나라 도하부대가 부교 위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틈을 타 그들을 향하여 맹렬한 궁시 공격을 가하였다. 그러자 부교에 있던 수나라군 일부 병사들은 물속에 뛰어들어 고구려군과 마주 싸우면서 요하 동안으로 상륙하려고 하였다. 수나라 맥철장과 전사웅도 전투에 뛰어들어 결사적으로 독전하였다. 그러나 수나라군은 끝내 대안의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한 채 다수의 사상자만 내게 되었다. 맥철장과 전사웅 등 맹장들이 혼전 중에 잇달아 전사하고, 수군은 여지없이 참패하고 말았다. 이 도하작전에서 수나라군이 의외로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자 수나라군 수뇌부는 전군의 사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일단 퇴각명령을 내려 도하부대를 철수시키고, 부교도 철거하여 강 서안으로 거두어 들였다. 이로써 수나라군 도하부대와 고구려의 요하 수비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전투는 일단 고구려군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그 당시 요하 동안에 배치된 고구려군은 요동성에 소속된 요하 수비군이었다. 고구려군도 이 전투에서 사상자가 적지 않았으나, 천연 해자인 요하와 그 주변의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수나라 도하부대에게 타격을 가함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초전에서 고구려군이 수나라군의 도하 기도(企圖)를 저지하는 데에 성공을 거둠에 따라 고구려군은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지역의 여러 성이 전투태세를 강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고구려군은 수나라의 도하부대가 일단 도하공격 기도를 유보하자, 요하 동안의 방어진지를 재정비하고 대안에 있는 수나라 군영의 동태를 주시하면서 차후 다가올 결전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수나라 군영에서는 최초의 접전에서 맥철장, 전사웅 등 주요 장수들이 잇달아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고구려군의 항전태세가 매우 굳건한 것을 알고 크게 당황했다. 그리하여 20여 일 동안 일체 군사작전을 중지한 채 차후 전투의 대책 수립에 골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수나라군의 후속부대가 그 후방 일대에 도착하여 포진하면서 일시 침체되었던 군세가 왕성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수양제는 또다시 대규모의 도하작전 감행을 결심하고 소부감(少府監) 겸 섭우둔장군(攝右屯將軍) 하조(何稠)에게 추가로 부교를 대량 제작하라고 명령하였다. 부교 제작이 완료되자 수나라군은 일제히 도하작전을 재개하면서 압도적인 우세한 전력으로 요하 동안의 고구려군을 압박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의 방어선은 무너지고, 요하 수비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요동성으로 퇴각하였다. 수나라군도 이 도하작전을 통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작전에서 요하를 건너는 데 성공하고 곧이어 요동성 공략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다른 한 번은 당나라 현경(顯慶) 3년(기원 658년) 6월에 영주(營州, 현재 요령성의 조양<朝陽>)도독 정명진(鄭明振)이 거느린 당나라 북방수비군이 고구려를 교란하여 군력을 떨어뜨리려고 일으킨 교란전이다. 그때 고구려를 먹어치우는 부친 태종의 사업을 이어받은 지 벌써 10년이 넘게 된 당고종은 고구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란전술로 고구려의 군력을 떨어뜨린 다음 대거 진공하기로 하고 영주도독 정명진에게 고구려 교란전을 펼치게 하였다. 이리하여 정명진은 부장(副將) 설인귀와 함께 북방수비군을 이끌고 임유관(臨楡關, 즉 산해관)을 넘어 요동방향으로 쳐들어가게 되었다. 다년간 중원을 도모하고 있던 연개소문은 이 틈을 타서 정명진의 북방수비군을 요택으로 유인하여 섬멸하고 임유관으로 진출하는 것을 중원도모(후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이 뜻을 실현하지 못함) 전반 전투의 일환으로 삼고 군력을 배치하여 그들과 접전하게 하였다. 유현종의 소설 <연개소문>에서 그때 쌍방의 접전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구체적인 상황은 아래와 같다.

20만의 고구려 보군(步軍)은 요서의 대릉하 방면에 집결해서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10만의 수군은 요동반도 남단의 비사성과 황해의 복판에 떠서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열흘이 지나갔다. 그때 뜻밖에도 연개소문이 중원으로부터 건너온 화발(火拔)을 받았다. “영주에 주둔 중이던 당의 북방 수비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고구려의 국경을 침공하기 위한 이동으로 보입니다.” 연개소문은 바짝 긴장했다. 뒤이어 들어올 보고를 기다렸다. 과연 이틀이 못되어 양만춘의 화발이 들어왔다. “영주의 당군이 임유관을 빠져나와 침략을 개시했음. 적은 약 5만, 대장군은 영주도독 정명진이며 부장은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라 함. 적의 공격목표는 요동성으로 보임.” 화발을 받은 연개소문은 잠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연개소문은 곧 군령을 내렸다. “임유관을 나온 적은 대릉하 방면으로 진출해 올 것이다. 그들이 통과하도록 길을 만들어 주라. 그냥 두었다가 요택의 늪지대에 들어서면 적을 섬멸한다.” 연개소문은 화발을 띄우게 하고 왕성의 수비를 아우인 연정토(淵淨土)에게 맡긴 뒤 그는 요동성을 향해 떠났다. 검산성에 있던 보군원수부가 요동성으로 옮겨져 있었던 것이다.

한편 5만의 병력을 이끈 영주도독 정명진은 임유관을 통과하여 요서의 벌판으로 나섰다. 대릉하 쪽으로 접근해 왔다. 이곳은 고구려의 국경 요새가 있는 곳이었다. 앞서 멀리 나가 있던 첨병이 돌아와 정명진에게 보고했다. “요새를 지키는 고구려군사는 1만이 못 돼 보였습니다.” “1만이 못 돼?” 정명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부장 설인귀를 돌아다보았다. “정확한 관측인 듯합니다. 고구려는 전방의 주력부대를 요하 주변에 묶어두고 있습니다. 밀고 나갑시다.” 정명진은 약간 망설이는 눈치더니 드디어 공격 명령을 내렸다. “당의 2만 기병이 삽시간에 요새 주변으로 몰려들며 대릉하 방면의 국경요새가 차례로 무너지고 우리 고구려수비군 1만은 참패를 당하여 쫓기고 있다 합니다.” 요동성의 보군원수부에 보고가 들어왔다. “됐다. 적에게 눈치 채지 못하도록 싸우면서 패퇴하여 요택지방까지 유인하라. 그런 다음 적이 늪지대의 중간을 통과할 때 장군 온사문(溫沙門)은 적을 섬멸하도록.” 그렇게 지시를 내린 연개소문은 곧 수뇌회의를 열었다… 드디어 연개소문은 결정을 내렸다. “고한수 경의 말대로 따르기로 하겠소.” “정명진의 당군이 요택지로 들어와 박살이 나면 그걸 신호로 삼아 전군(前軍)은 임유관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만리장성을 때려 부수고 탁군을 점령하라. 그리고 수군도 보군의 움직임에 맞춰 흑벌무는 함대를 몰아 묘도를 공격하여 발해만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이종손(李鍾孫) 함대는 산동의 동래(東萊), 등주(登州)를 기습하여 적의 수군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섬멸하라.”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고구려 보군은 명이 떨어지자마자 만리장성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이때쯤 정명진의 당군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요택의 늪지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정명진이 거느린 침략군 5만은 고구려 국경을 깨뜨린 여세를 몰아 요택의 늪지대로 들어섰다. 요택만 통과하면 요하에 다다를 수 있고 요동성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명진은 당의 고종(高宗)으로부터 먼저 요동 땅을 탈취하여 고구려 정복을 위한 발판으로 굳혀놔야 한다는 밀명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공격을 해온 것이다. “여긴 요택입니다. 조심해서 진군해야겠습니다.” 대장군 정명진이 너무 빨리 행군을 몰아치는 것을 보자 부장군 설인귀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염려마시오. 나도 선제(先帝) 태종께서 통한의 참패를 당하시던 계절은 공교롭게도 모두 눈보라가 치던 겨울이나 장마가 계속되던 장마철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지금은 6월이요. 장마가 오려면 한 달이나 남았소. 지금은 건조기요. 고구려 병도 장마철이나 겨울에 군사를 매복시키지 지금은 시키나 마나인 철이요.” 정명진은 자신만만했다. “조금만 더 속도를 내면 패퇴하는 고구려군의 목덜미를 잡을 수 있다. 속히 이 늪지대를 통과하라.” 그는 채찍을 휘둘렀다.

그때였다. 전방에서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터져 오른다. 석포(石砲)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냐?” 앞으로 전진해가던 당병들이 주춤했다. 고구려군이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뒤돌아 선 모양이다. “쾅!” 이번엔 굉음이 뒤에서 터져 오른다. “아니, 배후에도 적이다!” 전군은 멈춘 채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적의 움직임이었다. 함성소리가 터져 오르더니 고구려의 기병들이 새까맣게 쏟아져 달려온다. “허. 적의 계략에 빠졌구나. 전군은 동요치 말고 앞뒤의 적을 막아 싸우라!” 당황한 적장 정명진은 그렇게 군령을 내렸다. 부장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앞뒤로 닥쳐든 고구려병은 2만이 넘어 보였다. 양군은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가 늘어나는 측은 당군이었다. 당군은 기병뿐만 아니라 보급치중차대(補給輜重車隊)와 노무자 그리고 많은 보군을 거느리고 있는 반면 고구려기병은 거칠 게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당군은 짓밟히다가 간신히 북쪽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벌써 군사의 절반을 잃은 정명진은 혼신의 힘을 다해 채찍을 휘둘렀다. “앗.” 정명진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고각소리와 함성소리가 쏟아지며 일단의 고구려 군마가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측면에서 나타난 고구려군의 장수는 양대하(梁大河)였다. 어쩔 수 없는 듯 정명진은 양대하 앞을 막아 나섰다. 그러나 정명진은 양대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10여 합을 견디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면(四面)이 완전하게 막혀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군은 포위망을 좁히면서 공격해 들어왔다. 당병은 어지럽게 짓밟힌다. 요택의 늪지대에서 벌어진 전투 상보(祥報)는 이튿날 아침 곧 요동성의 원수부에 보고되었다. “요택으로 들어온 정명진·설인귀의 당군 5만은 양대하 장군의 복병에 걸려 완전히 섬멸을 당하고 정명진·설인귀는 남은 병사 2천을 거느리고 요하 북부지방으로 창황히 달아났다 합니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戰死) 5천, 부상 3천으로 밝혀졌습니다.” 보고를 받은 연개소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요택으로 들어온 당병이야 그 병력으로 맞서도 이길 수 있고 계략으로 맞서도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연개소문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만리장성의 임유관으로 진격하고 있을 고구려 전군(前軍)의 전투상황 보고였다…(중국 강유동<姜維東>의 <당여전쟁사(唐麗戰爭史)>에 정명진과 설인귀가 거느린 당나라군과 고구려군 사이의 그 접전을 언급했지만 싸움의 구체적인 과정과 상황은 서술되지 않았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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