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원이 만난 서정자 초당대 명예교수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정월 나혜석은 여전히 ‘뜨거운’ 인물이다.

급진적인 여성해방사상을 주창한 선각이자 화가이자 문필가였던 그가 세상을 등진 지 벌써 60년이 지났지만, 나혜석의 이름이 거론되는 자리에는 여전히 격렬한 찬양과 논쟁이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예술적 삶과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고 ‘여자도 사람이다’는 당연한 명제대로 살아내려 한 그의 생애와 사상은 특히 고향인 수원에서 각별한 조명을 받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조성되고 예술제나 전시, 미술대전이 열리는가 하면 기념관 건립까지 추진되고 있을 정도다.

‘스캔들의 여왕’과 ‘위대한 선각자’라는 엇갈린 평가가 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냈다. 한국근대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나혜석의 소설 ‘경희’를 발굴하고 ‘제1회 나혜석 학술상’을 수상한 여성문인 연구의 대가 서정자 초당대 명예교수에게 나혜석을 물었다. 21세기에 그를 기린다는 것의 의미와 올바른 방향은 덤으로 질문에 얹었다.

2일 오후 용인시 수지구 성복동 자택에서 만난 서 교수는 나혜석을 “‘조선의 여자’, ‘수원 출신’이란 틀에 가두지 말고 영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여성해방가들과 견주어야 한다”면서 “나혜석의 생애와 사상이 알려지만 반드시 세계적인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혜석을 한마디로 평가해주시죠.

“자기 몸을 실험용으로 해부실에 기증한 것과 같아요. 온몸을 던져 정직하게 자아를 정시하고 삶을 하나도 거짓 없이 공개했어요. 그렇게 사는 사람이 없죠. 내가 배운 대로 사는 사람이 있으면 나라가 이러겠어요? 누구나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가지 (나혜석처럼) 자신이 믿는 대로만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여성도 사람이다, 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 하고 그렇게 산 거예요. 외국 사람들이 백남준, 문선명, 김대중밖에 모르는데, 나혜석이 알려지면 반드시 세계적인 인물이 될 거예요. 이런 사람 없어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화가와 문인으로서의 나혜석이 제대로 조명되고 있습니까?

“제가 1918년 발표된 <경희>를 1988년에 발굴했으니 70년만에 찾아서 읽어준 거예요. 그 전에는 한국근대미술소장인 이구열씨가 주로 미술적 측면에서 조명을 하셨는데, 이때부터 나혜석이 문인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했죠. <경희>는 당시 이광수를 능가한다고 평가를 해요. 지금은 나혜석의 문학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몰라요. 한국문학사연표에 등장하고 한국문학전집에 작품이 수록될 정도이니 완전히 인정을 받았다고 할 수 있죠.”



-나혜석의 사상을 보통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1기 여성작가인 세 사람을 보면 나혜석은 양반집 딸, 김일엽은 목사 딸, 김명순은 첩의 딸, 신분이 굉장히 달라요. 그런데 전부 도덕적으로 파멸해서 비극적인 종말을 맞아요. 공통점을 찾아보니 여성해방주의 사상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천을 했어요. 전통 여성들의 삶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여버린 거예요. 오늘날에는 나혜석의 삶이 너무 이해가 안 가죠. 몇 단계 뛰어올라 성(性)의 해방까지 실천하다보니 저희도 굉장히 이해가 안 가잖아요. 대학생들이 동거를 어렵지 않게 생각하는 걸 우리 세대는 용납할 수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혜석은 그걸 더 뛰어넘었으니 아직 가부장적인 사상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수원시에서 나혜석의 이름을 딴 기념관을 건립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건립되는 게 바람직할까요?

“우선 세계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여자 나혜석’ 그러면 안 되고 ‘세계 속의 나혜석’을 재구성하고 위대한 여성들과 함께 놓으면 이건 절대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예요. 그리고 수원의 예술성을 최대한으로 살리면 좋겠어요. 이를테면 나혜석의 전시를 보고 나오면 화령전이 나온다든가 성곽과 연결이 된다든가. 아름다운 화성 행궁과 화홍문 같은 것들과 연결 되게 기념관을 만든다면 세계 속의 인물 나혜석을 부각하는 동시에 예술성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최고의 예술성을 살리는 게 성공하는 길이라고 봐요. 아무도 없는 전시실에 혼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해도 마음의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그런 곳이요.”

 

   
 

-나혜석은 독립운동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했나요?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18년 귀국한 후 이듬해 3·1운동이 발발할 때 주모자들과 어울려 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앞에서 만세를 부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가를 만나러 평양까지 갔다오거나 했죠. 자금을 동원해 보려다 실현은 못했지만, 그것도 죄가 돼서 옥살이도 하게 된 거죠. 소설 <회생한 손녀에게>에는 국권상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써 있어요. 이광수, 김동인 아무도 안 썼잖아요? 나혜석은 썼거든요, 통 큰 여자죠.”



-남편 김우영에게 결혼조건으로 4가지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일생을 두고 사랑해 줄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 줄 것, 그리고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인데요. 마지막 요구는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힘드네요.

“김우영은 그녀의 희망대로 신혼여행길에 병사한 최승구의 묘에 들러 비석을 세워줬어요. 나혜석은 내가 최승구를 사랑했었노라 부정을 안 하는 거죠. <테스>라는 소설에서 테스가 과거를 고백한 것이 비극의 시작이 됐잖아요. 거기서 훈련도 받았겠다 얘기를 안 하는 게 원칙인데, 이분은 내가 최승구의 약혼자였다, 내가 이 사람하고 사려면 우선 정리를 해야겠다 하는 당당한 여자죠.”



-결정적으로 이혼동기가 된 최린에게 쓴 편지 중 ‘내 평생을 당신에게 맡기오’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하시나요?

“나혜석은 불륜을 저지른 뒤 ‘공을 사랑하지만 공과 결혼하지는 아니하겠나이다’ 했고 최린은 ‘그것 참 잘 생각했다’고 했어요. 그러다 세계일주 후 생계가 어려워지자 최린에게 도움의 편지를 보냈어요. 그러나 편지 내용이 지인을 통해 와전되어 오해를 사게끔 잡지에 보도 됐어요. 최린도 나혜석을 돌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닌데, 그걸 약점으로 잡혀서 (최린이) 친일파가 되고 말았다 그런 얘기가 있어요. 나혜석이 남편의 트집에 ‘쩨쩨하다’고 따지자 조선 남자로서 김우영의 자존심이 상하면서 부부 사이는 어그러졌고요.”



-<이혼고백서>에서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한 사회관습을 비판하고 해체돼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혹시 사디스트 성격은 아니었나요?

“이명온씨의 <흘러간 여인상> 같은 글들은 나혜석이 변태적으로 남자를 밝혀서 스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는 둥 이렇게 쓰고 있는데요. 제가 나혜석을 세계적인 안목으로 봐야 한다는 건, 우선 나혜석의 의식이 형성된 배경을 봐야 한다는 거죠. 당시 일본에서는 개인주의, 자유주의적 사상이 놀랍도록 전개가 돼요. <세이토>라고 하는 일본의 유명한 페미니즘 잡지도 이어서 등장하고요. 나혜석은 이것들을 그야말로 스폰지처럼 받아들인 거예요. 1920년대 일본 유학생들은 성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분방했고요. ‘조선 여자 나혜석’ 이러면 완전히 미친 여자지만 세계적인 페미니즘과 근대화의 물결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놓고 봐야 나혜석이 이해가 되는 거죠.”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고 수덕사인근의 수덕여관에 오랜 기간 머무는 동안에는 무엇을 했나요? 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실에서 사망했다는 것은 추정인가요?

“평범한 칩거 생활을 했다고 보입니다. 구체적인 자료는 없습니다만 김일엽 스님이 거기 있으니 가지 않았다 싶고, 김일엽은 입산을 권하지만 본인이 안 하죠. 본래 크리스천이었지만 나중에 가정이 파탄나는 시련을 겪고 나서는 불교에 귀의합니다. 그래도 <흘러간 여인상>에 나온 것처럼 퇴폐적인 생활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기에는 이 분의 영혼이 상당히 고차원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걸 문제를 안 삼아 버리긴 한 것 같아요 이 사람은. 시립자제원에서 사망한 것은 확실히 나혜석입니다. 목도장이 하나 발견됐고 관보에 나혜석으로 나옵니다. 키와 사망일자, 이 분 입은 옷이 낡은 옷이다고 써 있어요. 다들 나혜석이라고 인정을 하죠.”



서정자 초당대 명예교수는

1942년 전남 목포 출생으로 1965년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7~2009년 초당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초당대학교 명예교수, 박화성연구회 회장, 세계한국어문학회 회장, 한국여성문학학회 고문,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혜석의 단편소설 ‘경희’와 ‘회생한 손녀에게’를 처음 발굴해 학계에 보고하는 등 나혜석을 필두로 김명순 박화성 지하련 등 여성작가의 전집을 발간했다.

특히 ‘근대여성의 문학활동’(수대 아시아여성연구소), ‘나혜석연구’(문학과 의식 제2호), ‘나혜석의 처녀작 ‘부부’에 대하여-최초의 여성작가론’(여성문학연구 창간호), ‘나혜석문학론’(초당대논문집), ‘나혜석의 문학과 미술 사이’(현대소설연구 제38호), ‘나혜석의 문학과 일본 체험’(문명연지 10권 1호) 등 다수의 나혜석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저서 및 편저로는 ‘한국근대여성소설연구’, ‘한국여성소설과 비평’, ‘원본 정월 라혜석 전집’, ‘북극의 여명’, ‘지하련 전집‘, ‘강경애선집 인간문제’, ‘김명순문학전집’, 수필집 ‘여성을 중심에 놓고 보다’ 등이 있다.

 

대담=오창원 문화체육부 부국장/cwoh@joongboo.com

정리=이효선기자/hyosun@

사진=강제원기자/je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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