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 대선경선 문재인 후보가 16일 고양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국 13곳 순회 경선 마지막 일정인 서울 지역 경선에서 누적 과반 득표를 확보해 당 후보로 확정됐다. 사진은 문 후보가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할 때 모습. 연합
김재득기자/jdkim@joongboo.com

 ‘노무현의 남자’가 정치 시작 1년만에 제 1야당의 대선 후보가 됐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1년 전만 해도 대선 주자의 지위에 오르리라고 본 이는 많지 않았다. 정치인의 삶을 원치 않았던 문 후보가 현실정치에 뛰어들 것이라고 예상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 대적할 후보가 부상하지 못하던 상황에 문 후보는 저서 ‘운명’ 출간 이후 일약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제1 야당의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다.

문 후보는 이 때부터 정치적 보폭을 넓혀 민주통합당 출범을 위한 야권대통합에 참여하고 4·11 총선을 거쳐 대권 도전을 공식화했다.

문 후보는 1953년 1월 경남 거제에서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이던 부모가 6·25 전쟁 발발 후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잠시 난을 피한다는 생각으로 월남한 것이 남한 정착으로 이어진 것이다.

문 후보 가족은 문 후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부산 영도로 이사했지만 연탄배달을 하고, 때로는 성당의 식사배급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가난했다.

문 후보는 경남중·고를 거쳐 1972년 경희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중고교 때 별명은 ‘문제아’였다. 이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술·담배를 입에 대고 4번의 정학을 받은 문제학생이기도 했다.

대학 시절에는 ‘반유신’ 투쟁에 나선 운동권이었다. 1975년 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시위를 주도하다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문 후보는 석방되기 무섭게 강제징집돼 특전사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했다.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 미루나무 제거조에 투입될 정도로 ‘정예용사’였다.

그는 1978년 제대후 사법시험을 준비해 이듬해 1차에 합격했다. 그러나 79년 부마항쟁과 10·26, 80년 ‘서울의 봄’을 거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다시 구속됐다. 2차 시험 합격소식을 들은 장소는 유치장이었다.

   
민주통합당 대선경선 문재인 후보가 16일 고양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국 13곳 순회 경선 마지막 일정인 서울 지역 경선에서 누적 과반 득표를 확보해 당 후보로 확정됐다. 사진은 문 후보가 아내와 함께 군에간 아들을 면회할 때 모습. 연합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한 문 후보는 판사를 희망했지만 시위 전력 탓에 좌절됐다. 변호사 길을 작정하고 부산으로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노무현 변호사였다.

그는 저서 ‘운명’에서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고 술회했다.

6월항쟁이 있던 1987년 5월 부산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 결성됐을 때 노무현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 문 후보가 상임집행위원을 맡을 정도로 부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1988년 4월 노무현 변호사는 13대 총선에 출마해 정치권에 진입했다. 문 후보는부산에 남아 노동관련 사건 변호나 노동운동 지원 일에 매달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대선 경선 때 문 후보는 노 후보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아 ‘업무적으로’ 다시 결합했다.

대선이 끝난 후 노 전 대통령은 문 후보를 붙잡았다.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가게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다.

문 후보는 청와대 생활의 시작과 끝을 노 전 대통령과 함께했다. 2번의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을 지냈다.

청와대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민정수석을 맡은지 채 1년이 못된 2004년 2월 그는 사퇴했다. 이를 10개나 뽑아낼 정도로 격무에 시달린 이유도 있었지만 그해 4월 총선에 출마하라는 열린우리당의 요구를 거절하며 생긴 불편함이 더 컸다.

그는 민정수석 사퇴 후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섰지만, 현지 영자신문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해 변호인단을 꾸렸다.

탄핵 심판이 기각된 뒤 그는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가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참여정부의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 비서실장을 맡았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때 그는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아 장례 전반을 관장했고, 이후 노무현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았다.

그는 2009년 10월 경남 양산 재보선 국회의원 후보, 2010년 6·2 지방선거 부산시장 후보로 거론됐지만, 한사코 현실정치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야권 대선주자들의 지지율이 제자리를 맴돌면서 문 후보의 등판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아졌다. 작년 6월 자서전 ‘운명’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면서 문 후보를 향한 정치참여 압박은 거부하기 힘들 정도가 됐다.

결국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작년 말 ‘혁신과통합’을 통해 야권대통합에 참여해 민주통합당 창당에 일조했다. 또 지난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나와 당선된 후 대선후보의 길로 들어섰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그에게 친노의 적통 자리를 물려줬지만 참여정부의 공과를 모두 안고 가야 할 책임까지 지웠다.

그는 저서 운명에서 “당신(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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