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세계가 놀란 천재소년, 50년 후…"실패한 천재? 난 지금 행복해"

   
 

‘천재’, ‘대한민국을 이끌 세계 최고의 두뇌’, 이같은 수식어가 매일 따라다녔던 IQ 210의 아이.

태어나 처음 맞이한 생일에 이미 한글과 천자문을 떼고, 만 3세때 미적분을 풀었으며 이듬해 한양대학교 과학교육과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만 8세에는 홀로 미국유학을 떠나 콜로라도대학 대학원에서 ‘핵/열물리학’ 석·박사 과정을 이수했고 만 10세에는 미국 항공우주국 NASA의 연구원이 됐다.

지난 2012년 8월에는 미국의 ‘슈퍼스칼라’라는 비영리 단체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10인’에 이름을 올렸다.

모두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천재’를 소재로한 영화 이야기 같지만 대한민국의 한 인물에 대한 실제 얘기다.

지난 20일 올해 4년제 종합대학으로 새로 출범한 신한대학교에서 만난 김웅용(52)교수의 얼굴은 밝았다.

올해부터 신한대 교양학부교수로 강단에 서는 김 교수는 어릴적부터 전세계를 놀라게 하며 영재로 주목 받았다.

이제 갓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한글과 한문을 배워 글을 쓰고 칠판에 어려운 수학 미·적분을 해석하며 문제를 풀어내자 그의 일상이 연일 화제가 됐다.

1960년대 대한민국은 그렇게 압도적인 재능을 보인 한 아이에게 빠져 버렸다.



#대한민국을 전세계가 주목하게 만든 아이

김교수는 지난 1962년 3월, 물리학교수인 아버지와 의학교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서 8개월쯤 됐던 어느날이다.

집에 찾아온 아버지의 후배들이 장기를 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소리를 내기 시작 했다.

“차야! 포야!”

김교수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생애 첫 생일도 맞지 않은 아이가 입으로 장기알에 새겨진 한자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던 아이가 생후 11개월째에는 이틀만에 한글을 깨우치더니 천자문까지 모두 익히며 손으로 쓰기까지 했다.

이제 막 돌을 지난 아이라고는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놀라움은 멈추지 않았다.

3살때는 작품활동도 시작했다.

시를 쓰고 그것들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기까지 했다.

김교수가 3살때 출간한 책에는 영어,독어 등으로 직접 쓴 외국어 작문과 붓글씨, 그림들까지 담겼다.

주변 사람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하며 3살짜리 아이가 만들어낸 이 책은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사람들은 태어나 만 4년8개월만에 4개국어를 구사하는 그를 두고 인류 역사상 나오기 힘든 천재라며 집중했다.

5살때는 특별 청강생 자격으로 한양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 김웅용 교수 3살때 모습

3살때부터 미·적분을 풀기 시작하면서 대학 수준의 교육은 그에게 가장 필요한 공부였다.

대학 공부를 시작한 같은해, 일본 열도까지 뒤흔들었다.

당시 일본 후지TV의 섭외로 출연한 프로그램에서 한복을 입은 꼬마가 대학생들도 어려워 하는 미·적분 문제를 칠판에 풀어내자 탄성과 환호가 터져나왔다.

일본 전역이 대한민국에서 온 천재아이의 얘기들 뿐이었다.

후지TV의 프로그램이 김교수의 출연으로 시청률 35%를 넘기자 방송국 마다 그를 섭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일본 전문기관에서 측정한 그의 IQ는 210이다.

세계기네스북에도 이름을 올렸다.

천재소년의 등장으로 1960년대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나라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8살때는 홀로 미국유학을 떠나 콜로라도대학 대학원에서 ‘핵/열물리학’ 석·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10살때는 미국 항공우주국 NASA의 연구원까지 되며 천재의 인생은 승승장구했다.



#나는 실패한 천재가 아니다

하지만 10살의 어린아이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NASA에서의 생활은 힘들었다.

매일같이 주어진 과제를 풀기만 하는 일상에 지치고, 힘들때 기댈 수 있는 친구도 없었다.

“정말 외로웠어요. 아무도 저와 친구가 되어 주지 않았어요. 일과 시간 이후에는 운동도 할 수 있고 취미도 즐길 수 있었지만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저는 다른나라에서 왔고 나이도 어려서 모두가 어른들인데 어린아이가 낄 수 있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천재적인 두뇌를 인정받아 NASA의 연구원이 됐지만 NASA는 그의 능력만 필요로 할 뿐이었다.

평범한 아이들처럼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보내야 할 시기에 혼자 외롭게 겪은 미국생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수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누구보다 뛰어난 두뇌를 가졌지만 그도 사춘기를 겪는 소년이었다.

8년이 지났을까 너무 힘들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결심했다.

1978년 여름, 김 교수는 NASA연구원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하면서 미국생활에서 얻은 경력으로 어디든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은 카이스트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은 난관에 부딪쳤다.

바로 졸업증명서다.

김교수는 어린나이에 미국에서 석·박사 과정까지 이수했지만 늘 청강생 신분이었기때문에 그 어떤 학력도 인정받지 못했다.

때문에 학점을 받은것도 학위를 인정받은것도 없었다.

단지 대학에서 공부만 했을뿐이었다.

이같은 현실이 입시문화가 극심한 대한민국에서 김 교수의 발목을 잡았다.

“학위증이 없으니까 갈 수 있는 곳이 단 한곳도 없었어요. 뒤늦게 대학을 들어가려고 하니 이번에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한 상황에 처했죠.”

천재라며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정작 그에게는 초·중·고교부터 대학교까지 단 하나의 졸업증도 없었다.

말그대로 무학(無學)인 셈이다.

대학 입학을 위해 초·중·고를 검정고시로 통과하고 대입체력장을 보러간 날.

이번에는 언론의 집중된 관심이 악평으로 이어졌다.

대입 체력장 성적부터 검정고시 성적까지 모두 공개되면서 ‘실패한 천재’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뭐든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를 깎아내리면서 ‘실패한 천재’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다시 돌아온 한국은 떠나기전 한국과 달랐다.

“저는 단한번도 제가 천재라고 말한적이 없어요. 저는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저를 꼭대기에 앉혀 놓고 다시 끄집어 내리는 거예요. IQ가 높다고 뭐든 잘 할 수 있는건 아니예요. 운동도 마찬가지고 제가 배우지 않은 학문은 전혀 모르는게 당연한건데 사람들은 다 잘 해야 하는거 아니냐고 말을 합니다.당연한걸 모르고 하는 얘기들이죠”

   
 

김교수의 말처첨 사람들은 한국을 떠나기전의 천재소년만을 기억했다.

천재라서 무엇이든 잘 해야 했고 그게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국와서 대학을 가고 싶었고 필요해서 검정고시를 봤고 대학입시를 본건데, 이게 다인데 뭐가 실패를 했다는 겁니까? 정말 이해 할 수 가 없었어요.”

김교수는 억울에서 잠도 잘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게 청주다.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온 그는 충북대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생활은 그에게 또 다른 삶을 안겨줬다.

태어나 처음으로 친구들과 어울리고 막걸리도 한잔 하면서 작은 일상 하나하나가 행복으로 다가왔다.

“저는 과거가 없어요. 어렸을때가 없다는 얘기죠. 초등학교부터 중·고교때 추억이 하나도 없는거예요. 그래서 대학생활을 하며 그동안 몰랐던 많은걸 배우고 또 그게 행복했습니다. 제가 행복을 느끼는데 이게 어떻게 실패한 거죠? 저는 실패한게 아닙니다.”



#교육자의 삶을 선택한 천재

김교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100편이 넘는 국제수준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꾸준한 학문 연구를 이어왔다.

1993년부터 연세대와 성균관대 등 11개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학 교단에 섰고 2004년까지 6년동안 카이스트 건설환경공학과 대우 교수로 대학원생들을 가르쳤다.

2006년 7월에는 충북개발공사에 공채로 입사해 준공무원의 삶을 시작했다.

천재는 그렇게 아내, 두 아들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그가 준공무원의 신분을 벗고 정식 교수가 됐다.

충북개발공사 사업처장에서 신한대 교양학부 교수로 임용돼 이직한 그는 경기북부개발연구원 부원장 직도 맡았다.

“교수가 꿈은 아니였어요. 제 꿈은 교수가 되는게 아니라 학생들에게 배움을 주고 그런 학생들이 사회에 나아가서 자신의 몫을 해내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는게 그것이 제 꿈입니다.”

분명 어릴적 천재로 불리며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그다.

하지만 과거의 명성보다 새로운 삶에 대해 행복해 하는 그는 분명 실패한 천재가 아니었다.

“머리가 좋은 천재로 주목받거나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요. 원하는 일을 즐겁게 하면서 가족, 이웃과 따뜻하게 소통하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대학 교단에 정식으로 서게 돼 너무 기쁘고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열정을 쏟을 생각이예요”

세계최고의 두뇌라는 명예도 출세할 수 있는 기회도 그에게 행복을 주지 못했다.

평범한 삶으로 돌아온 김웅용 교수,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을 만끽고 하고 있는 그는 성공한 천재다.

송주현기자/atia@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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