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 정약용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강진 유배지에서 ‘여유당전서’를 저술했다.

503권 182책의 여유당전서는 한 인간이 평생 베껴쓰기만 하기에도 불가능한 분량이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넘어선 저작의 탄생은 유배지 제자들과 함께 한 작업의 결실이었다.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뚫리는 고통’을 이긴 다산의 학문적 열정과 헌신적인 제자들과의 공동 집체 저술은 한자문화권 최대의 저술을 이루어낸 것이다.

남양주 실학박물관이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인 강진에서 결성된 다산학단의 활동을 살펴보고 경기도 실학문화의 지역적 전파를 조명하는 특별전 ‘유배지의 제자들-다산학단’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여유당전서를 비롯 황상, 윤정기, 이청, 이강회 등 유배지에서 다산 정약용과 함께 꿈꾸었던 제자들의 미공개 유물을 다수 공개한다.

‘여유당전서’는 치열한 희망주의의 산물이었다. 개혁에의 이상과 철저히 괴리된 절망의 현실을 딛고 서서 다산은 강진의 학동들을 당당한 학자로 길러 내었다. 제자들은 스승의 학문 정신을 몸과 마음에 체득했고 이를 실천했다.

다산의 강진 제자들의 구성은 다양하다. 양반 자제와 함께 읍중 제자들(이속층) 그리고 일군의 승려들도 있다. 조선에서 사제 관계의 전통으로 보아도 매우 특기하다. 다산은 개인적 처지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사대부 뿐 아니라 신분이 낮은 여항인과 승려와 교유하며 사제의 연을 맺었다.

다산이라는 큰 나무아래에서 제자들은 각자의 자질과 개성에 따라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천문학·농학·지리학·역사·기술·외교·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을 남겼다.

   
▲ 여유당전서

스승이 유배에서 풀려 집으로 돌아갈 때 제자들은 ‘다신계’를 결성했다. 서로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모임을 개최하여 스승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새겼다.

또 다산이 돌아간 지 10년 후 강진의 황상은 스승의 기일을 맞아 여유당을 찾아왔다. 이 때 다산의 아들 정학연과 황상은 두 집안의 유대가 후손들에게도 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황계(丁黃契)’를 맺었다.

이처럼 유배지의 제자들-다산학단은 위대한 학문적 성과를 쌓아 올렸다. 그리고 강진·해남 등 먼 바닷가의 고을에 ‘문명향’이란 명예를 안겼다.

전시와 함께 특별전 체험프로그램으로 다산과 제자가 함께 그린 ‘강진해안지도 목판 탁본 체험’과 아이들용 한자 교육을 위해 다산이 편찬한 2000글자 ‘아학편(兒學編) 스템프 체험’, ‘다산 실학마을 지도 그리기’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전시는 오는 10월10일까지 계속된다.

문의 031-579-6000.

송시연기자/shn8691@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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