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급한 상황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유민우(42)씨는 지난달 19일 오후 11시40분께 동안구 호계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퇴근준비를 하던 중 밖에서 여성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유씨가 곧장 밖으로 뛰쳐나가보니 한 여성은 골목길에 주저앉아 있고 남성은 달아나고 있었다.

순간 범죄가 일어났다는 걸 직감한 그는 달아나는 남성을 50여m정도 뒤쫓아가 격투 끝에 제압한 뒤 경찰에 인계했다.

범죄자를 잡은 공로로 그는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과 포상금을 받았다. 게다가 그는 포상금 전액을 홀몸노인 두분에게 전달했다.

“범죄자 잡아서 교도소 보내놓고 받은 돈을 나를 위해 쓰면 기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돈은 좋은 일에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받자마자 기부한거죠.”

아담한 체격을 가진 그는 지금의 삶을 ‘덤’이라고 생각한다. 죽을 고비를 넘겨서다. 결핵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가고, 중환자실에도 들어가 봤다.

“병치레를 하면서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어요. 사람은 분명 죽는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자 어차피 죽는다면 뜻있는 일을 하고 죽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도를 잡은 일도, 포상금을 기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남을 배려하는 그의 이면에는 아픔과 의지가 있다. 혼자 힘으로 삶을 개척했다.

그는 보육원 출신이다. 5살때 길을 잃고 헤매다 보육원에 맡겨졌다. 원장과 선배들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12살때 보육원을 뛰쳐나왔다. 세번 시도 끝에 간신히 성공했다. 천안에서 구두닦이, 중국집 배달원을 하다 19살때 안양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전자기판 샘플을 조립하는 일인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저는 정말 운이 좋았어요. 예전엔 잘 데가 없어서 길거리에서 자기도 하면서 나쁜 유혹에 흔들린 적도 있었죠. 그런데 천성이 그런지 잘 못하겠더라구요. 지금은 잘 데도 있고, 남한테 손 안 벌리고, 친구들 찾아오면 술 사줄 정도는 되니까 이 정도면 성공했다고 자부해요.”

이제 그에게 남은 꿈은 가족을 찾는 것이다.

2010년 가족을 찾는 방송에도 출연했지만 가족을 만날 수 없었다. 당시 유씨는 어머니와 떨어져 할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다. 할머니 등에 업혀서 논길을 걸은 적도 있고, 실수로 농약을 마셔서 버스타고 병원으로 추정되는 어디론가 실려 간적도 있다. 어느날 혼자 돌아다니다 길을 잃어 이름 모를 면사무소와 홍성군청을 거쳐서 충남에 있는 보육원에 가게 됐다

“나를 최초로 발견한 곳이 어디인지 누구인지 기록이 전혀 없어요. 믿을 수 있는 것은 이름 정도? 대개 이름을 모르면 원장의 성을 주는데 유씨인 것을 보면 이름은 맞는 것 같아요. 어머니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파마머리였고 미인이었어요. 어머니와 헤어지기 전 염전 근처를 거닐던 기억이 있어요. 소도 길렀고, 큰 기와집, 집 뒤에 있는 밭이 엄청 넓었어요.”

문제는 그 당시에 살던 곳이 어디인지, 미아가 된 자신이 최초로 발견 된 곳 또한 모른다. 유씨에 대한 기록은 보육원 입소년도와 당시 나이, 이름 정도다. 그것마저도 진짜 자신의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다행히 최근 누나라고 밝힌 분에게 연락이 왔다. 대구에 사는 여성분이다. 현재 유전자 검사를 의뢰한 상황이다.

“묻고 싶은 게 참 많아요. 나이하고 생일도 알고 싶고, 이름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내 고향이 어딘지도 알고 싶고 형제는 몇 명인지 친척은 있는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도 묻고 싶어요. 부모님이 못 살아도 괜찮고 늙어서 거동이 불편해도 괜찮아요.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상황이 돼서 같이 살 수 있으면 더 좋겠고요.”

그는 지금의 삶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다. 또 평생의 꿈인 가족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정현·최남춘기자/face001@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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