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천재 아니에요. 음악이 좋아서 피아노를 쳤고, 음악이 좋아서 공부를 했고, 그러다보니 상도 받고…그냥 음악이 좋았을 뿐이에요.”

지난 13일 만난 작곡가 정승용(45)씨는 ‘천재’라는 호칭에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작곡가의 살아온 길을 듣다보면 자연스레 그를 ‘천재’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6살 때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으며, 독학으로 전국대회 최우수상 수상, 3개월여만에 작곡과 입학, 폴란드·독일·오스트리아 등 유럽 동부권 음대 졸업, 세계 5대 현대음악제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 Steirischer Herbst(슈타이어막의 가을)에서 최고 작품 수상 등 그의 내력은 범상치 않다.



#어깨너머 배운 음악, 인생의 길로

그가 처음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6살 때부터다.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던 어머니께서 작은 누나를 위해 집에 피아노를 들여놨다. 그는 누나 옆에서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그리고 따라치기 시작했다.

정 작곡가는 “누나, 형들이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보며 따라 쳤다”라면서 “계명이 맞는지도 틀린지도 모르고 혼자서 피아노를 쳤고, 어린이 찬송가도 쳐봤다”고 밝혔다.

독학으로 피아노를 쳤던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전국대회 최우수상 수상을 시작으로 중학생때부터는 해마다 각종 음악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하지만 법대 출신이었던 아버지의 반대로 예술고등학교 진학은 물론이고 피아노 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는 “아버지께서 법대를 가기를 원하셨고 피아노를 잠궈버리기까지 하셨다”라면서 “중학교때 서울예고 진학을 이야기했다가 학교를 찾아가 한바탕한 적도 있으시다”고 말했다.

결국 정 작곡가는 일반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접지 못하고 2학년 때 집에 말하지도 않고 부모님 몰래 이공계로 바꿨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는 고3이 되어서도 계속됐다.

그는 “여러번 아버지께 말씀드렸지만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라면서 “그래서 부모님께서 스스로 포기하시도록 특단의 방법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모의고사에서 일부러 한 번호로 모든 시험을 본 것이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정 작곡가는 “아버지께서 고3 여름방학때 (음대를 가고 싶으면)담당 선생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대신 재수는 안된다고 하셨다”라면서 “시험이 3개월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작곡과가 아니면 음대를 들어가기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다른 학과는 수년동안 집중적으로 배운 학생들도 붙기 어려운 곳이기 때문에 단시간 연습해 음대에 합격할 수 있는 학과는 작곡과 뿐이었다.

정 작곡가는 “당시 연세대 3학년에 재학중이던 주영수 선생님을 소개받았다”라면서 “40여일 동안 그분의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작곡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어 “선생님께서 시험삼에 안양대에 입학원서를 내보라고 하셨고 거기서 장학생으로 붙었다”고 덧붙였다.

#배우면 배울 수록 더 공부하고픈 음악

정 작곡가는 안양대 작곡과에 입학을 하고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 만족할 수 없었다.

지도교수였던 최동선 교수가 유럽 동부권 3대 음악원이라고 불리는 폴란드 쇼팽음악원을 추천했다.

정 작곡가는 그날로 쇼팽음악원에 작품을 보내고 1994년 무시험으로 특별 입학한다.

그곳에서 ‘현대음악’을 처음 접했다.

정 작곡가는 “그전까지 고전 음악만 공부했지 현대음악에 대해서는 공부한 적이 없었다”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첫 학기말 고사에서 낙제를 받을 정도로 엉망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교수님께 무릎을 꿇고 빌어 겨우 학생증을 지켰낼 수 있었다”라면서 “겨울 방학동안 열심히 공부했고 이듬해 학기가 시작할 때 교수님께 작품을 드렸더니 만족해 하셨다”고 덧붙였다.

코톤스키 지도교수는 그해 보스턴 국제 콩쿨에 출품을 권유했으며, 그의 작품은 최종 결승까지 올라갔다.

1996년 여름, 쇼팽음악원에 졸업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는 “음악을 어렵게 시작한데다가 본토 유럽에 나가서 배우다보니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라면서 “배우면 배울수록 더욱더 공부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마침 주영수 선생님께서 독일을 추천해 무작정 갔다”고 덧붙였다.

1997년 독일 본에 도착한 그는 이듬해 가을 칼스루헤 국립음악원에 시험을 보고 입학한다. 하지만 거기서도 만족하지 못한 그는 일부 과정만 수료하고 2002년 가을 오스트리아 빈 국립 음악대학원에 입학한다. 당시 빈 국립 음대 교수였던 쿠어트 슈베어트직 교수한테 작품을 보내고 무시험으로 입학했다. 2년뒤 그는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 음악대학원에 또다시 무시험으로 입학한다.

1990년 안양대에서부터 2008년 그라츠 국립 음대까지, 무려 15년동안 작곡만 공부한 것이다.

그런 그가 작곡가로서 날개를 달게 된 것은 2008년 오스트리아 현대음악제다.

   
 

#2008년과 2014년, 그리고 미래.

정 작곡가는 15년간 음악공부만 한 이유로 “혼자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언제나 부족하다고 느꼈고 그러다보니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런 그에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준 것은 세계 5대 현대음악제로 불리는 2008년 오스트리아에서 개최된 ‘Steirischer Herbst(슈타이어막의 가을)’이다.

그는 자작곡 Monolog(독백)을 출품한다. Monolog은 클라리넷,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피아노를 위한 실내악으로,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저항의 정신으로 맞선 시인 이육사의 ‘독백’을 모티브로한 곡이다.

이곡은 최고 작품으로 선정되며, 오스트리아 제 1국영방송(ORF 1)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방송된다.

정 작곡가는 “교수님의 추천으로 지원하게 됐지만 최고 작품상을 수상할 수 있을지 예상도 못했다”라면서 “작곡을 할 수 있을 지조차 의문이 들었는데 상을 수상하면서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겼다”고 밝혔다.

그는 이 상을 계기로 한 사람의 작곡가로 성장하게 된다. 이후 그는 오스트리아 기독교 총감독 등 다양한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유럽에서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2010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갑작스레 ‘야인(野人)’ 아닌 ‘야인(野人)’으로 살게 된다.

정 작곡가는 “경기도내 문화예술 기관의 대표를 맡아달라는 요청에 귀국했다”라면서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서 맡을 수 없었고 이때 충격을 받아 모든 활동을 접었다”고 말했다.

한동안 대외활동을 중단했던 그가 지인들의 도움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정 작곡가는 “쿠어트 슈베어트직 교수를 비롯한 유럽에서 만난 교수님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라면서 “이번에 미국 연주도 이들이 도와준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LA의 캘리포니아예술대학에서 Monolog을 지휘했다. 윌리암 E. 포웰(William E. Powell) 클라리넷 교수가 자신의 정년퇴임 기념 음악회에 연주와 지휘를 정 작곡가에 직접 부탁했기 때문이다.

정 작곡가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하고, 관중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전율이 흘렀다”라면서 “이제는 방안에서 머무는 것을 그만두고 내가 가진 재능을 펼치는데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 작곡가는 현재 이탈리아 작곡가 안드레아 페란테가 그의 아들 첼리스트 가브리엘 마리아 페란테를 위해 부탁한 첼로소나타를 쓰고 있다.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크라리넷 수석연주자였던 마르콧 토마스를 위한 Monolog 클라리넷 6중 합주곡도 쓰고 있다. 그의 합창곡 ‘주님 다시 사셨다. 할렐루야’(Jesus ist auferstanden. Halleluja)가 벨라루스 국립오케스트라와 국립합창단의 연주로 선을 보일 예정이다.

이제 정 작곡가는 한국은 아니지만 세계로 날개짓을 하고 있다.

이복진기자/bok@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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