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좋아하던 어린 소녀가 우연히 고지도 한 점을 발견했다.

소녀가 고지도를 처음 발견했을 때 그 아름다움에 한번,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에 또 한번 반하게 됐다.

그렇게 고지도를 한 장 두 장 모은 세월이 어느새 40여년이 흘렀다.

경희대학교 혜정박물관 김혜정 관장의 이야기다.

그렇게 단순한 호기심에서 모으기 시작한 고지도가 2만여 점이 넘어갈 때쯤 그는 고지도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됐고, 25년 전부터는 한일관계, 한중관계 속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뒷받침을 해줄 증거자료로 고지도를 수집하고 있다.

그렇게 그의 손에 들어온 고지도는 보물이 되고, 대한민국이 처한 국제정세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중요한 근거자료가 됐다.

그는 여전히 고지도를 모은다.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모아온 고지도가 국가의 큰 보탬이 되길, 뜻 있는 곳에 쓰이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고지도, 역사를 만들다

우선, 그렇게 오랜 시간 고지도 수집을 계속하는 이유에 대해 궁금했다. 이류를 묻자 그는 “너무 예쁘지 않아요”라며 소녀 같은 환한 미소를 보였다. 관장실에 걸린 고지도는 그의 말대로 예뻤다. 아니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오랜 세월을 보내왔을까. 고지도는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도는 꿈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한국에 살지만 저 아프리카에는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고, ‘어떤 나라일까’ 꿈꾸게 하죠. 특히 고지도에는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습니다. 신화와 전설상의 이야기, 탐험과 여행에 관련된 이야기, 제작 당시 국제관계와 관련된 이야기 등을 알 수 있죠. 또 지도제작자들의 철학과 예술관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되기도 하죠. 이처럼 고지도는 인간사의 이해와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조망해 보는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그는 고지도를 모으면서 한일, 한중과의 관계에도 주목했다. 특히 재일교포인 그는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교포들의 인권과 위해 한일간의 역사문제를 조명하는 고지도 수집에 열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한일관계를 이야기 할 때 ‘당했다’ ‘빼앗겼다’라고만 이야기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너무나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죠. 그렇다면 우리가 일본에게 치욕스런 과거를 회생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고지도를 통해 일본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이후 근현대사의 동해와 독도문제를 증명하는 고지도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우리 것이 돼 갑니다. 특히 독도 문제는 많이 거론될수록 재일동포 60만 명의 아픔만 가중됩니다. 요즘도 일본에 가보면 ‘조센징 떠나라’는 대모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표면화 시키지 않고, 조용하게 독도문제에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료의 중요성이죠.”



#고지도, 민간외교의 첫걸음

그는 고지도에 대한 연구를 전문적으로 진행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2002년 경희대학교에 소장품을 모두 기증, 고지도 전문박물관 ‘혜정박물관’을 설립했다.

“‘평화’라는 두 글자를 끌어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지나간 역사에 대해 잘잘못만을 가리고 있죠. 이제는 한일간, 한중간을 넘어 평화라는 두 글자를 후대에 선물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 자신과의 약속이죠. 그래서 박물관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물관에는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의 고지도와 지도첩, 고문헌 등 26만여점이 소장돼 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매년 우리나라 영토와 영해에 관련된 다양한 특별전시도 진행된다. 특히 그는 한일 공동 포럼 등을 개최해 일본과의 외교적 갈등을 풀어나가는 민간외교관 역할을 해 나가고 있다.

“지난해는 하야시다 히데키 전 일본문화청 장관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을 모시고 한일 박물관 포럼을 진행했습니다. 이런 역할을 함으로 인해 싸늘해져 가는 한일 관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죠.”

그는 7개년 계획을 세워 제주도에 박물관을 독립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7년 뒷면 제 나이가 무지 든든한 나이가 되죠. 지난해부터 다양한 작업들을 진행해왔습니다. 제주도에 설립될 박물관은 테마박물관입니다. 단순히 보는 지도에서 떠나지도 속에 담긴 역사를 공부하고,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박물관입니다.”

또 국외에서 활동하며 사회에 공헌하고 있는 많은 교포들을 소개하는 인물공원도 함게 만들어 질 계획이다.

“전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그 모진 세월을 견뎌가며 우리 사회에 훌륭한 일을 하신 분들도 있죠. 이런 분들의 2세, 3세들의 국적이 바뀌어 갈 때마다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이 분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 정신을 기억하고자하는 마음에 인물공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요즘 한 가지 큰 바람이 있다. 바로 이 고지도들이 올바르게 쓰이는 것이다.

“외국에 유출된 자료를 가져오기 위해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내에 있는 자료를 어떻게 잘 활용해야 하는지 연구하는 것이 우선 돼야 합니다. 소중한 자료들이 필요한 곳에 쓰일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지원책이 마련됐으면 합니다.”



#‘엄마’라는 이름

그는 고지도 수집과 연구를 제외하고 특별한 이력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어머니.’ 그는 1985년 전 재산을 기부해 제주도에 중증장애인복지시설인 혜정원 아가의 집을 설립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다는 질문에 “아주 쉬운 결정이었습니다.(하하)”라며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아마 숙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자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 무엇을 하는 것이 사회와 소통하고 사회에 보탬이 되는 것일까 고민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사회의 어머니가 되자는 생각을 하게 됐죠. 내가 낳은 자식, 낳지 않은 자식에 상관없이 ‘엄마’가 되어 준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엄마라는 부름을 내 것으로 하고 싶었죠.”

1987년도 정식 이사장 취임을 해서 땅을 일구고, 건물을 짓고, 집기류 채워 넣기까지 어느 하나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돈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결제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친인척을 고용하지도 않는다. 모든 권한을 외부 인사에게 맡겨 혜정원을 운영해 나가고 있다. 매년 진행되는 사회복지재단평가에서 ‘우수’ 등급을 받아온 것이 그의 철학을 뒷받침 해준다. 현재는 제주에서 30년 모범경찰로 퇴직한 전 경찰관을 원장으로 추대해 2년 전부터 운영을 일임하고 있다.

“아이들로 하여금 모든 것이 제 복으로 돌아오더라고요. 방 한칸 내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아이들의 ‘엄마’일 수 있어 참 행복합니다.”

송시연기자/shn8691@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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