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일보-단국대 분쟁해결연구센터 공동기획/지역갈등, 나라 멍든다

   
 

선호시설의 명칭을 둘러싼 갈등은 심리적 측면이 중요하다. 2005년 부산과 진해에 걸쳐 조성된 신항의 명칭을 생각해 보자. 자치단체와 주민들은 부산신항, 진해신항, 또는 부산-진해신항 등으로 자신들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명칭을 제시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단순히 ‘신항’이었다. 해양수산부가 중앙항만정책심의위원회를 열고 ‘신항(영문명 Busan New Port)’으로 결정하면서 갈등이 종결된 것이다. 10년이 흐른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이왕이면 우리 지역 이름을 집어넣고자 했던 당사자들이 공평하게 양쪽 모두의 이름을 빼는 것에 합의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명칭에 대해서도 진해를 비롯한 경남 지역이 반발해 단식 투쟁을 하고, 법원에 명칭 무효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헌법재판소가 기각하면서 갈등이 마무리됐다.

철도역의 명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충청남도는 천안과 아산 지역의 KTX 역을 처음에는 천안역으로 했다가, 역사의 위치가 아산시인데 천안역이란 이름은 문제가 있다는 아산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나왔던 것이 장재역이었다. 역사가 속한 행정구역이 아산시 배방면 장재리라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장재역이 천안이나 아산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명인 점을 감안하면, 앞서 살펴본 ‘신항’처럼 감정적 공평함을 추구한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논리는 비슷했지만, 최종 결과는 달랐다. 천안과 아산 주민들은 장재역이라는 명칭이 적절하지 않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건교부는 결국 고속철도역 명칭선정자문위원회를 통해 천안아산역으로 최종 확정하게 된다. 아산 시민들의 반발을 감안해 ‘천안아산역( )’형태로 해두고, 아산시에서 지역을 상징하는 명소 등을 건의하면 괄호 안에 같이 표기하기로 하는 것이 명칭의 뒤에 오게 된 아산에 대한 배려였다.

최근 이와 유사한 갈등이 이천에서 문경을 연결하는 중부내륙철도의 한 정거장에 대해 일어났다. 국토교통부가 ‘철도 노선 및 역의 명칭 관리지침’이라는 고시까지 만들어 놨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드러내는 사례다.

   
▲ 단국대 전형준 교수

갈등의 중심에 있는 112 정거장은 이천에서 충주까지 연결되는 구간의 이천 쪽 두 번째 정거장이다. 이 정거장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인구 밀집 지역에 가깝게 정거장 입지를 선정하다 보니, 경기도와 충청북도가 만나는 곳인 장호원과 감곡의 경계선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양측은 서로 자기 쪽 자치단체의 이름으로 역명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철도 노선이나 역의 명칭을 어떻게 짓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국토교통부 고시로 나와 있다. 기본적으로 행정구역의 명칭을 쓴다든가, 둘 이상의 지방자치단체와 관련된 사항에 대하여는 해당 광역자치단체장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등의 규칙이 그것이다.

이번 112 정거장의 경우 양 자치단체의 주민들이 사실상 하나의 생활권이어서 나름대로 대화를 통해 갈등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역사의 위치를 양 지역의 경계인 국도에 거의 인접해서 감곡 쪽에 두고 역의 명칭은 장호원역으로 하는 것에 대해 주민들 간에 합의가 된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합의에 있어서 또 다른 중요 당사자인 국토교통부나 철도시설관리자가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합의 내용을 나중에 전달받은 철도시설관리자는 지금은 역사명을 확정지을 때가 아니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시에 따르면 “철도시설관리자는 철도건설사업 시행 등으로 인하여 철도 노선 또는 역이 신설되는 경우 해당 공공시설에 대한 노선명 또는 역명 제정 방안을 마련하여 해당 시설의 운영개시 예정일 8개월 전까지 구토교통부에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 “다만,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경우 국토교통부와 사전에 협의하여 그 기간을 따로 정할 수 있다”는 단서도 붙어 있다.

또한 “국토교통부장관은 노선명 또는 역명의 제정이 필요한 때에는 철도시설관리자로부터 이와 관련된 의견을 제출받아 해당 시설의 운영개시 예정일 5개월 전까지 이를 확정하여야 한다”는 조항도 있다.

문제는 8개월 전까지라고 할 때, 이것이 8개월~9개월 정도에만 해당하고 5년 전에는 해당되지 않는지이다. 수학적 논리 차원에서 본다면 5년 전이 8개월 전에 포함되므로 일찍 역명에 대한 제정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관행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8개월 전까지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일을 5년 전에 당겨서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다. 철도시설관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렇게 일찍 역명을 확정지었다가 나중에 또 다시 역명이 문제가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난감할 수도 있다. 이미 규정상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간단하겠지만, 아직 8개월이 되려면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 한다면 역명을 또 다시 바꿔주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는 것이다.

이쯤되면, 문제는 이름이 아니라 불확실성이 된다. 8개월 쯤 남았을 때 할 일을 5년 정도 남은 시점에서 할 경우 발생하는 4년 여에 대한 불확실성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가 새로운 질문이 되는 것이다. 합의 형성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나의 해법은 합의 내용에 대해 조건을 두는 것이다.

남은 4년 여 동안 어느 한 당사자 집단이 합의 내용을 변경하려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등의 조항을 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는 합의가 무시될 가능성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이른 합의형성 분야에서는 상황적합적 조항이라고 한다. 미래의 발생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조건을 두고, 그 조건으로 인해 합의 내용을 바꾸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측이 합의한 내용을 지키는 조건으로 법원에 공탁금을 걸어놓을 수도 있다. 합의한 내용에 대해 다시 문제 삼거나 한 번 정해진 역명을 바꾸자고 하는 경우 공탁금을 상대 자치단체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한다면 합의 이행과 관련된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는 줄어들 수 있다. 만약 양 자치단체가 모두 합의 내용을 잘 지키면 운영개시 예정일 5개월 전에 공탁금을 찾아가면 된다.

이처럼 역명을 정하는 데 있어서 기초자치단체, 광역시, 철도사업자, 주민들 등이 이해당사자가 된다. 어떤 이해당사자가 좋은 제안에 반대한다면 단순히 그렇다고 인정할 것이 아니라, 왜 반대하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왜?”라는 질문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물어보는 과정에서 숨겨진 이해관심사가 도출될 수도 있다.

김한규기자/livekim@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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