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④고려의 교통로…개경 중심 '사통팔달'

   
▲ 대구봉무동 유적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도로 노출 전경. <사진=영남문화재연구원>

서영일 (재)한백문화재연구원장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길(교통로, 도로)이다.

교통로는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자와 정보를 유통시키는 혈관이다. 인류 역사에서 교통로의 발전과 정비는 일종의 문명의 상징처럼 인식되어 왔다.

근대 이전 한국은 교통로가 제대로 발달되지 않았다는 오해가 있다. 오해의 근원은 19세기 말의 한국의 도로를 관찰한 서양인들의 견문록이다.

당시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들의 눈에 우리나라의 도로는 그들에 비하여 너무나 보잘 것이 없었다. 조선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낙후된 이유를 형편없는 도로 사정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일제에 그대로 이어졌고 한국이 근대화를 이룩한 것도 일본이 도로를 놓았기 때문이란 억지를 부리는 근거가 되었다.

한국인 중에도 우리 조상들은 도로를 만드는데 관심이 없었거나 만들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더구나 조선시대 상황이 이 모양인데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사정은 더 엉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수레를 사용하지 않고 지게가 보편화된 것도 도로 사정이 열악했기 때문이란 억측을 하기도 한다.

사실 한말의 열악한 도로 사정은 당시 나라의 재정 상태가 나빠서 도로에 대한 정비나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그 이유가 있었다.

이를 그 이전 시기에 적용하기는 무리가 따른다. 최근 경주나 부여 등지에서는 삼국시대의 도로 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차도와 인도가 구별되고 도로의 노면을 수레가 다니기 편리하도록 포장까지 하였다.

신라에서는 국가가 통치와 군사적 목적으로 관리했던 도로를 ‘관도’라 하였다. 신라 관도는 5세기 말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였는데 군사의 통행과 군수지원은 물론, 서라벌로 조세와 생필품을 운반하는 통로였다. 관도의 관리와 유지는 병부에서 담당하였다. 이미 신라시대에 한국의 교통로 체계는 거의 완성되었다

고려시대 국가의 간선로는 ‘역도(역로)’라고 불렸다. 919년 고려의 왕도가 개경(개성)으로 정해졌는데 고려 정부는 이때부터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의 교통로를 재편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의 역도는 처음 군사적 목적과 관련하여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역도는 후삼국 통일 및 거란과의 항쟁 등에서 군수지원에 꼭 필요한 수단이었다. 수로는 조세의 운반과 군사 보급로로, 육로는 병력이동 및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는 목적으로 정비되었다.

따라서 고려 왕실에서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지방 세력을 특히 우대하였다. 이들을 포섭하여 교통로를 확보하고 군사지원체계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경기도에서는 광주, 양주, 이천, 안성 등의 지방 세력이 중용되었다.

거란과의 전쟁 역시 고려시대 교통로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 경기도 일대 산성 조사에서는 광종(949∼975)에서 현종(1010∼1031)때까지 경기도 광주, 안성, 평택 등지에 산성이 대대적으로 수축되었던 사정이 밝혀졌다.

   
 

고려 초까지 산성은 군사 거점뿐만 아니라 지방 통치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산성 수축은 신라의 산성에 외성을 덧붙여 규모를 확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군사와 지방통치의 거점을 확보하고 그 주변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고려의 지방제도가 점차 정비되면서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역도가 완성되었다. ‘고려사’에는 전국에 약 525개의 역과 이 역을 서로 연결하는 22개의 역도가 기록되었다.

고려시대 역은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를 위한 시설로 일반인은 이용할 수 없었다. 특히 고급관리들이 주로 이용을 하였는데 하급관리도 이용을 제한받았다. 고려시대 역도는 통행하는 사람과 수레의 수에 따라 대로, 중로, 소로 등으로 나누어졌다.

역도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역이 설치되었다. 각 역에는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와 일꾼들이 있었다. 국가에서 토지를 주어 여기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역을 운영하였다. 역도와 역을 담당하는 관청은 병부였다. 고려 교통로의 정비가 군사적 필요성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로, 교량, 나루 등을 건설하는 책임은 토목공사를 담당한 공부의 몫이었다. 역도의 관리는 병부가 하고 건설은 공부가 담당하는 이원화된 체제였다.

‘고려사’의 기록을 참조하면 당시의 역도의 노선을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경기도 지역에 해당되는 역도는 청교도, 춘주도, 평구도, 경주도, 충청주도 등 5개다.

청교도는 개경에서 남경(서울)에 이르는 길로 인천과 수원까지 연결되었다. 소속된 역으로는 청교역(개성), 통파역(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마산역(파주시 파주읍), 벽지역(고양시 일산), 영서역(서울), 평리역, 상림단조역(파주시 적성면), 청파역(서울), 노원역(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행주역(고양시 행주동), 종승역(김포시 양촌면), 금륜역(수원), 중림역(인천), 녹양역(양주시 고읍동) 등이 있었다. 역의 위치로 추정하면 개경-장단-적성-양주-서울 광진나루로 이어지는 길과 장단-파주-고양-서울-수원(또는 인천) 등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춘주도는 개경에서 춘천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소속된 역으로는 상수역(남양주), 감정역(가평) 쌍곡역(포천), 안수역(포천시 포천읍), 임천역(연천군 청산면) 등이 있었다. 그 위치로 보면 개경-장단-연천-포천-가평을 지나 춘천으로 가는 길과 개경-서울-남양주-청평-가평으로 이어지는 두 가지 노선이 있었다.

평구도는 서울에서 원주로 연결되는 길이다. 소속된 역은 평구역(서울), 봉안역(광주), 오빈역(양평), 전곡역과 백동역(지평) 등이 있었다. 청교도에서 연결되어 광주-양평-지평 등을 지나서 원주로 연결되는 노선으로 지금의 중앙선 철도와 유사하였다.

경주도는 충주나 청주 방면을 통해서 경주로 가는 길이다. 소속된 역으로는 덕풍역(하남시 덕풍동), 남산역(광주시 광지원리), 경안역(광주시 역동), 안리역(이천시 신둔면), 무극역(이천시 장호원읍), 오천역(이천시 마장면), 양재역(서울 양재동), 장가역(서울 장지동), 안업역(성남 수내동, 조선시대 낙생역), 금령역(용인 역북동), 좌찬역(용인 원삼면 좌항리), 분행역(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분행마을) 등이 있었다.

   
▲ 서울시 금천구 독산동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도로. <사진=겨례문화유산연구원>

역의 위치로 추정하여 보면 경주도는 두 개의 노선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덕풍역을 출발하여 광주-이천-장호원으로 연결되는 충주 방면의 길과 판교-용인-양지-죽산으로 연결되어 청주 방면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충청주도는 서울에서 공주로 이어지는 길이다. 소속된 역으로는 동화역(화성시 봉담읍 동화리), 원천역(수원시 원천동), 청호역(오산시 대원동 역말), 가천역(안성시 원곡면 내가천리) 등이 있었다. 경주도의 안업역이나 청교도에 금륜역을 출발하여 오산-안성 등을 거쳐서 천안으로 가는 길이다.

‘고려사’에 기록된 역과 역도는 고려시대 모두 일시에 정비된 것은 아니고 활용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었다. 특히 경기도의 고려시대 역도는 남경 설치를 전후로 큰 변화가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부터 개성과 서울 사이의 간선은 장단-적성(호로고루)-양주-서울(광진나루)-풍납동 등을 거쳐서 이천과 수원 방면으로 연결되는 노선이었다.

고려 초에는 이 노선을 주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고려 중기 남경이 설치(1067년)되면서 남경으로 가는 지름길인 장단-임진나루-혜음원-벽제-서울(남경)-사평나루(서울 한남동)-양재-과천-수원 등으로 연결되는 노선이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개경에서 전라도나 충청도 방면으로 갈 때 지름길이었다. 다만 영남으로 갈 때는 여전히 광진나루를 지나는 옛길이 활용되었다.

역은 민간인이 이용할 수 없었기에 민간 여행자들을 위해 역도 주변에는 원이라고 하는 숙박시설이 있었다. 고려시대 원은 파주 혜음원과 같이 국가에서 민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기도 했지만 대부분 사찰에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간 구제 차원에서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의 원은 조선 전기에 대부분 국유화되어서 계속 운영되다가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대부분 없어졌다. 대신에 주막과 같은 민간시설이 이를 대체하였다.

역로의 규모가 대, 중, 소로 분류되었지만 각각 그 규모와 구조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송나라 사람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산이 많고 도로가 험하여 수레로 운반하기가 불리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군사(군수물자)는 수레로 운송하며, 수레는 말로 끌게 한다”는 기록도 있다. 또 “고려는 비록 해국(海國)이지만, 무거운 짐을 끌고 먼 곳을 가는 데는 거마(車馬)를 폐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토지가 낮고 좁으며 도로에는 모래와 자갈이 많아 중국과 비교되지 않으므로 수레의 제도와 말을 어거하는 방법도 또한 다르다”고 했다.

중국에 비하여 도로의 폭이나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이지 수레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려시대 역로는 적어도 수레가 교행하여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너비와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역도는 정치와 군사적 목적으로 주로 활용되었던 것이기에 말이나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고 관리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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