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⑥'고려가요' 속 개경·개경 사람들

   
▲ 처용무(궁중의궤도설) : 처용무의 기원은 신라에 있으나 고려와 조선조를 통하여 궁중나례(宮中儺禮)와 연례(宴禮)에서 처용면(處容面)을 쓰고 추는 괴이호방(怪異豪放)한 일종의 무극으로 연행(演行)되어 왔다.

홍순석 강남대학교 교수

#고려가요는 고려시대의 대중가요이다

대중가요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대상을 진솔하게 대변해준다. 대중가요는 당대 사회의 현상과 변화를 가장 감각적인 언어로 담아낸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작자 미상으로 전한다. 어쩌면 작자 미상이라는 은닉성 때문에 더 진솔하게 당대의 정황을 노래하고, 대중이 공유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고려가요는 인위적으로 개작된 역사적 기록보다 진솔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려가요는 고려의 시대상을 가늠하는 데 소홀시 할 수 없는 자료이다.

고려가요는 ‘고려사’ 악지의 속악조를 비롯하여 ‘악학궤범’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같은 궁중악을 수록한 문헌에 채록되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려가요들은 거의가 고려 후기의 작품이다.

대부분 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재래의 민요를 새로운 궁중무악(宮中舞樂) 혹은 연악(宴樂)으로 재편하여 수용한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가요의 향유층은 민중에서부터 왕실과 그 주변인물인 권문세족까지 다양하다.

비록 궁중악으로 소용된 가요였다 할지라도 그 사설의 원천은 민요에 있으므로 본래의 작자층은 민중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재창작하여 향유한 왕실과 그 주변인물인 권문세족은 수용자인 셈이다. 따라서 단편적이지만 고려가요를 통해서 고려시대의 민중에서부터 상류층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 개경 사람들의 사랑과 이별의 정한을 담아낸 가요들

고려가요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의해 ‘남녀상열지사’로 평가되었듯이 남녀간의 강렬한 사랑 혹은 그에 따른 이별의 애틋함을 담은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서경별곡’ ‘가시리’ ‘동동’ ‘이상곡’ ‘만전춘별사’를 들 수 있고 ‘정석가’ ‘사모곡’ ‘상저가’ ‘쌍화점’ 등도 이러한 주제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미적 범주의 측면에서 볼 때, 고려가요의 대부분은 우아미를 바탕에 깔면서 비극미를 구현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고려가요의 배경이 되고 있는 당시 사회 현실이 투영된 때문이다. 이 시대는 잦은 내우외환으로 사회가 극도로 불안정하게 되고, 그에 따른 삶의 파탄과 비극적인 현실은 결코 현실을 우아하게만 바라볼 수 없게 하였다. 신라시대처럼 비참한 삶을 의탁하고, 고통을 이겨낼 만한 뚜렷한 신앙이나 이념도 확고하게 설정되지 못하였다.

불교는 현실적 의의를 상실한 채 타락해갔고, 신흥사대부계층에 의하여 새로이 채택된 성리학도 확고한 사상으로 작용하기에는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향가처럼 신앙이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숭고미의 구현은 불가능하였다. 다만 이 시기의 숭고미는 무속집단을 중심으로 한 무가계통의 궁중무악에서 구현되었을 뿐이다.

현전하는 대부분의 고려가요는 고려 예종 11년(1116)에 송나라로부터 대성악이 들어옴에 따라 고려의 전통가악에 일대변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생성되었다.

그리고 원나라 지배이후 잡극의 영향으로 새로운 악곡에 맞는 가요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처용가’ ‘쌍화점’ ‘만전춘별사’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고려 개경인들의 세시의례를 노래한 ‘동동’

후렴이 “아으 동동다리 아으 다롱디리”로 불려지는 ‘동동’은 서정적 측면에서 볼 때 남녀간의 연정을 월령체로 담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개경 사람들의 생활 의례적 측면서 보면, 다분히 팔관회나 연등회에서 펼치던 불교 의례적인 노래이다.

즉, 월운제의(月運祭儀)에 관련한 기원의 노래이다. 고려의 국가행사였던 팔관회에서 월운제의를 하며 ‘동동’을 불려지다가 나중에 고려시대 궁중무용의 하나인 아박(牙拍)의 반주가로 불리었다.

이 노래에서 2월은 연등, 5월은 단오, 6월은 유두, 7월은 백중, 8월은 추석, 9월은 중양을 각각 배경으로 하고 있다. 1월은 답교(踏橋), 3월은 산화(散花), 12월은 나례(儺禮)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송나라 상인들의 교역처이자 쉼터였던 예성강

송 상인들이 고려를 방문한 것은 고려측의 공식 기록만 해도 1014년(현종 3)부터 1278년(충렬왕 4)까지 260여년간 120여 차례에 걸쳐 최소 5천여명의 규모에 이른다.

외래 상인들이 개경에 머물면서 상거래를 활발하게 전개하고, 머무는 동안 다양한 연예 활동도 펼쳐졌다. ‘예성강곡’이라는 고려 가요도 이같은 시대상에서 나왔을 터이다. ‘예성강곡’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송 상인의 우두머리 하두강은 예성강에서 미모의 여인에게 반하였다. 그 여인을 취하고자 남편에게 접근하여 바둑을 청하고, 처음에는 일부러 져주면서 남편의 경계심을 푼다.

마음을 놓은 남편에게 막대한 금품과 아내를 걸고 내기 바둑을 두어 끝내 여인을 빼앗는다. 남편은 뉘우치는 마음으로 슬픈 노래를 불렀지만 때는 늦었다.

여인을 데리고 돌아가던 하두강은 단단한 여인의 몸 매무새 때문에 범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맴돌기만 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겨 점을 치니, “여인의 정절이 대단하므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배가 부서질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하는 수없이 여인을 돌려보냈다.

이에 여인을 기쁨에 찬 노래를 불렀다. 훗날 남편이 불렀던 노래와 함께 ‘예성강곡’이라는 노래로 탄생한 것이다. 아쉽게도 노래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쌍화점’에 나타난 고려시대 개경의 서역인

   
 

고려시대는 대외교류가 활발하였던 시기이다. 가깝게는 송(宋), 요(遼), 금(金), 원(元). 일본 등과 멀게는 서역과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국제무역항이라고 할 수 있는 벽란도에는 많은 서역인들이 왕래하였으며, 일정 기간 정착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일면을 ‘쌍화점’에서 볼 수 있다.

이 노래는 충렬왕 때 향각(香閣)이라는 무대를 설치하여 임금 앞에서 남장별대(男粧別隊)가 연희하기도 하였다. 전반적으로 당대의 자유분방한 성윤리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 하다.

성희롱의 주체에 따라 장이 바뀌는데, 회회(回回)아비, 삼장사 사주(社主), 우물의 용, 술집아비의 4장으로 구분된다.

특히 1장에서 “쌍화점에 쌍화 사러갔더니,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하였다. ‘쌍화’는 만두이다. 쌍화점은 만두 파는 가게이다. ‘회회아비’는 몽골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서역인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서역인 경영하는 만두가게가 있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교역을 위해 서역인이 개경을 방문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눌러 앉아 만두가게를 경영하고 있는 것이다. 원의 속국이었던 고려에 서역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것은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쌍화점’은 바로 그런 시대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고려시대 사대부의 생활상이 투영된 ‘한림별곡’

고려 고종 때 한림학사들이 지은 ‘한림별곡’에 열거된 문화와 대상들은 모두 당대 사대부층이 향유하였던 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노래를 통하여 고려 개경의 상류층 문화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한림별곡’은 모두 8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에서는 당대 대표적인 문장가와 유행하였던 문체를 확인할 수 있다. 1장에 나오는 금의(琴儀) 문하의 유원순(兪元淳), 이인로(李仁老), 이공로(李公老), 이규보(李奎報), 진화(陳樺), 유충기(劉沖基), 민광균(閔光鈞), 김양경(金良鏡) 등이 한 장씩 돌아가며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2장에서는 당서·한서·노자·장자·한유문집·유종원의 문집, 이백·두보·왕휘지·백낙천의 시집, 태평광기 등의 서적이 널리 읽혀졌음을 알 수 있다. 3장에서는 서체와 명필을 열거하였다. 4장은 술을 노래한 부분이다. 당대 유행하던 술로 황금주·백자주·송주·예주·죽엽주·이화주·오가피주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장에서는 홍목단·백목단·홍작약·백작약·옥매·장미·지초·동백·대나무·복사꽃 등이 열거되었다.

고려시대 개경의 정원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단락이다. 6장에서는 당대 음악을 가늠할 수 있는 거문고, 가야금, 비파, 장고 등의 악기와 그에 능한 사람들을 소개하였다.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과 누각을 들춰 풍경을 경탄하였다. 8장은 그네의 장관을 노래한 단락이다.



#‘청산별곡’에 나타난 고려시대 개경 사람들의 고뇌와 방황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로 시작되는 ‘청산별곡’은 고려가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주제와 어구 해석에 관하여 여러 견해가 맞서 있다. 어떤 이는 대부분의 다른 속요처럼 ‘짝사랑의 비애’ 혹은 ‘실연으로 세상을 등진 도피의 노래’로 본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삶에의 강인한 집착을 담은 적극적인 현실참여의 노래’로 보기도 한다.

또 고려 후기의 사회상을 반영한 노래로 보아 ‘땅을 빼앗기고 유랑하는 농민집단의 현실을 담은 노래’로 파악할 수도 있다.

혹은 ‘12·13세기에 극렬하게 일어났던 농민·천민의 난에 가담한 하층민의 참담한 현실을 담은 노래’로 해석하기도 한다. 여하튼 작중 주인공은 참담한 현실에서 고뇌하며, 새로운 세계를 갈구하고 있다.

‘청산’과 ‘바다’에서의 새 삶을 그려보지만 어데고 간에 안주할 없는 상황이다. 밖으로는 거란·여진·몽고족 등 외족의 침입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에 이어, 무단정치가 지속되는 고려시대의 것이라는 인식과 깊이 관련 맺고 있다. ‘청산별곡’은 이와 같이 내우외환 속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고려시대 개경의 지식인, 또는 삶의 터전을 잃고 유랑하는 민중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