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장 흔하고 서민적인 음식이 된 짜장면. 그러나 예전에는 짜장면만 먹고 나와도 이쑤시개를 갖고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그만큼 귀하고 접하기 어려운 요리였다.

세월이 흘러 단순히 짜장면, 짬뽕, 탕수육으로만 기억되던 중식은 그 깊이를 쉽게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해졌다.

이러한 중식계에서 곡금초(64) 셰프는 그 실력과 경력이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화교요리사다. 이미 최고의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허락되면 주방에서 일하고 싶은 곡 셰프. 그가 지나온 이야기를 들어봤다.



#화교소년, 중국집 배달부되다

1950~1960년대 배고픈 시절이었다. 당장 먹는 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한국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화교 소년은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일찍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동네에서 구둣방 일을 했다. 실에 기름칠을 하는 일이었지만 적잖이 힘들었다. 도시락을 싸가야 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어머니를 고생시킬 수는 없었어요. 직장에 다니면서 배고픔을 해결하고 월급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청요리집(당시 중식당) 배달일을 시작했어요.”

나무로 만들어진 배달가방에 짜장면, 짬뽕 등 음식을 담고 배달을 했다. 비가 오면 물을 먹은 나무배달통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2년간의 고달픈 배달 생활. 어느새 한 쪽 팔이 길게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곡셰프는 배달일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운명이겠거니’라며 받아 들였다.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할 수 있어 힘들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배달일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식당 안의 일이 배우고 싶어졌다.

“그때만 해도 한국사람은 중식당에 들어오기 힘들었어요. 대부분의 조리사들이 화교였죠. 당시 서울에 있는 큰 중식당에 일자리가 없는지 알아봤어요. 주방은 16살때 처음 들어갔죠.”

하루 종일 일만 했다. 명절 빼고는 쉬는 날도 없었다. 8시부터 조개탄을 깨 콧구멍까지 새카매질 정도로 불을 피웠다. 그릇도 닦고 청소도 하고 틈틈이 주방일을 곁눈질로 배웠다.

어쩌다 한 번 짜장이나 짬뽕을 볶을 때면 음식을 내어놓고 얼른 뛰어가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지 얼굴을 살피곤 했다. 그리고 그릇을 비운 손님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열심히 하다보면 명사부들이 불러서 제자로 삼아 키워줬어요. 사부들의 눈에 들어 기술을 배우려면 무조건 부지런히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죠.”

곡셰프의 성실함은 ‘대려도’, ‘아서원’, ‘태화원’ 등 내로라하는 중식당을 모두 거치며 기술을 익혀나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공과 실패를 가져다 준 ‘만다린’

영광의 순간은 일찍 찾아왔다. 당대 최고의 대사부들 밑에서 기술을 배웠던 곡셰프는 27살 젊은 나이에 서울 신촌 ‘만다린’에서 12명의 조리사를 거느린 총 주방장이 됐다. 조리장도 칼판도 곡셰프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오로지 실력으로 인정받은 결과였다.

“가게 주인이 먼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고 채용을 했다면, 이후에 계속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손님들의 판단이죠. 음식 맛이 없었다면 벌써 짤렸겠죠?”

그렇게 곡셰프는 유명한 중식당을 거치며 명성을 쌓아갔다.

실력과 명성을 가진 남부럽지 않은 주방장 생활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늘 들어왔던 아버지의 조언이 곡셰프의 마음을 움직였다. 자신만의 중식당을 가져야 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월급쟁이 생활은 누가 조금만 돈을 더 준다고 하면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이죠. 아버지는 이곳저곳 옮겨 다니기보다 너의 기술로 너의 장사를 하라고 하셨어요.”

곡셰프는 경북 영천에서 작은 중식당을 운영하다 고민 끝에 1990년대 초에 서울에서 취영루를 열었다. 그리고 10년 뒤인 2000년대 초에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성남 분당에서 ‘만다린’을 개업했다.

곡셰프의 만다린은 큰 인기를 끌었다. 13개의 분점이 생기고, 백화점 내에도 입점해 손님들의 입맛을 잡았다. 말 그대로 ‘승승장구’였다.

그런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 찾아왔다. 가게가 늘어나면서 점점 관리가 어려워진 것이다. 평생 요리만 했던 그에게 수많은 가게를 이끌어 갈 경영능력이 부족했고, 이는 사업 실패로 이어졌다.

건강도 나빠졌다. 곡셰프는 결국 모든 가게를 접었다.

“어떻게 다 관리하겠냐며 사업확장을 만류했던 아내에게 미안했죠. 모든 것이 저의 탓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관리를 잘못했구나.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안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정석 없는 변칙은 안된다

곡셰프가 지금의 상해루를 다시 열게 된 것은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그는 불 앞에서 진지하고 자신의 요리에 정직하다.

“요리에 대한 자부심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요. 요리의 생명을 안다고 할까요. 무엇을 어떻게 넣어야 맛이 나는지를 아는거죠. 기술로는 ‘이게 정석이다’라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어요.”

곡셰프의 자부심과 자신감은 오랜 세월 터득해온 연륜에서 나온 것이다.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곡셰프도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수 속에서 어떻게 해야 가장 맛있는 요리가 되는지 알아가는 과정을 거쳤다. 곡셰프는 그러한 과정이 바로 ‘기술’이자 자신만의 ‘요리철학’이라고 설명했다.

“무엇이든 오랜 세월을 꾸준히 하면 전문가가 됩니다. 그렇게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연륜인거죠.”

그런 곡셰프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재료’이다. 중식에서 재료관리는 생명이라는 것.

곡셰프는 좋은 재료를 빠른 시간 안에 사용하는 것을 신념으로 삼고 있다. 선도가 조금만 떨어져도 요리의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미묘한 차이를 손님은 모를 수 있어도 곡셰프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다.

후배들에게도 하루에 소비되는 양을 꼼꼼히 체크해 냉장실에 들어간 재료는 24시간을 넘기지 말라고 주문한다.

“재료가 안 싱싱한데 음식이 맛이 있을 수가 있나요. 또 부드러운 요린데 많이 볶아서 질기게 만든다면 맛이 없죠. 정석 안에 변칙은 있어도 정석 없는 변칙은 안되는 겁니다.”

중식계의 대사부(大師傅)인 곡셰프에게 재료를 검증받으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럴 때마다 곡셰프는 “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불을 켜봐야 믿을 수 있다”며 직접 테스트를 한다. 그렇게 검증을 거치다보면 자연스럽게 좋은 재료들을 접할 수 있고, 저렴한 가격에 구입도 가능해진다.

지난해 곡셰프는 큰 수술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셰프옷을 벗지 않고 있다. 대신 자신의 상황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또 다른 미래를 꿈꾸고 있다.

“큰 계획은 없지만 자연스럽게 만다린을 다시하게 되면 나이도 있으니 객잔을 운영하고 싶네요. 중국술, 중국요리를 즐겁게 먹을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해서 요리를 하고 싶습니다.”

구민주기자

사진=이정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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