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⑦고려의 관문...벽란도
▲ 고려의 교역망 : 고려는 등 거리 외교로 주변국과의 적절한 긴장과 협력관계를 유지했으며 주변국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과도 교역했음을 알 수 있다 . |
이재범 경기대학교 교수
벽란도는 경기도 개풍군 서면의 예성강 하류에 있는 하항(河港)이다. 우리나라의 강들은 바다의 조수 간만의 영향을 받아 물의 깊이가 크게 차이 난다. 만조시에는 대형 선박들이 강의 중류까지 올라갈 수 있는 양항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 한강은 그러한 조건을 대표적인 강을 노량진, 송파진, 동작진 등과 같은 많은 하항들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도읍인 개경을 흐르는 예성강도 그렇다. 예성강의 대표적인 하항은 바로 벽란도였다. 벽란도는 문자 그대로 ‘푸른(碧) 물결(瀾) 나루(渡)’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진도의 벽파진(碧波津)과 같은 뜻이다. 벽란도의 본래 이름은 예성항(禮成港)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부근 언덕에 있었던 벽란정(碧瀾亭)에서 명칭을 가져왔다고 한다.
고려의 관문으로서의 벽란도의 모습은 중국 송나라 때의 문신으로 1123년(고려 인종 1)에 사신으로 고려에 다녀간 서긍의 ‘고려도경’에 잘 나타나고 있다. 송에서 배(神舟)가 벽란도에 도달하면 고려인이 채색을 한 배로 마중을 나오는데, 사자(使者)는 조서를 받들고 벽란정(碧瀾亭)으로 가서 봉안이 끝나면 묵었다고 한다. 다음날 새벽에는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이 군대의 호위를 받아 가며 성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 의장 행렬이 매우 위엄이 있고, 호화로왔다는 것을 ‘고려도경’은 전한다.
다른 나라의 사신들도 고려의 첫 인상이 벽란도였음은 말할 나위 없다. 국가 사절은 물론이고 고려를 찾는 상인들이 처음으로 마주치는 곳도 벽란도였다.
#벽란도를 통한 고려의 개방성
벽란도가 위치한 예성강은 황해도 고달산(高達山)에서 발원한다. 예성강은 우리나라의 다른 강들과 마찬가지로 바다에서 밀물로 인한 역류현상이 발생하여 이 강 어귀에서부터 30㎞에 이르도록 영향을 받는 감조하천(感潮河川)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벽란도에 대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수심이 깊어지는 때에는 바다로부터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고려의 도읍을 후배지로 두었던 벽란도는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무역항으로서의 벽란도의 모습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된 시를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조수가 들고나니
오고 가는 배의 꼬리가 이어졌구나
아침에 이 다락 밑을 떠나면
한낮이 되지 않아 돛대는 남만(南蠻) 하늘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배를 보고 물 위의 역마라고 하지만
바람처럼 달리는 준마도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고려 시대 최고의 하항(河港)이었 뿐만 아니라 국제 항구로 발전하였던 벽란도를 통하여 당시 고려의 개방적이고 역동성이 있었던 활기 있는 상황을 연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고려는 주변 국가들과 다양한 외교관계를 구사했는데, 송은 물론 요나 금과도 활발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일본과의 교역도 이루어졌고, 남양지방(南洋地方)과 서역(西域)에서도 바다를 통한 상인들의 내왕도 활발하였다.
▲ 황비창천명 : 거울 황비창천명은 밝게 빛나고 창성한 하늘 이라는 뜻으로 배가 항해하는 모습을 그린 고려인의 활발한 해상활동을 묘사한 유물이다. |
#벽란도를 통한 고려의 교역품
바다를 통한 우리나라의 교역은 고려 이전으로 소급되지만, 벽란도를 통한 고려의 교역은 공무역 중심으로 성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주요 대상은 다양하였는데, 교역품도 그에 따라 다양하였다.
고려의 가장 중요한 무역 상대였던 송으로부터 고려는 왕실이나 귀족 생활에 필요한 비단·옥·차·향료·약재·서적·악기·화폐·상아·공작 등이 수입되었고, 송으로는 금은세공품·모시·인삼·화문석·나전칠기·종이·붓·벼루 등을 수출하였다. 고려 종이는 아름답고 질겨서 송의 문인들에게 인기가 높아 비싼 값으로 중국 내륙에까지 유통되었다고 한다. 당시 송과의 교역로는 북쪽으로는 예성강에서 옹진반도와 대동강 입구를 거쳐 산동 지역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예성강에서 자연도·군산도·흑산도를 거쳐 양자강 하류의 명주에 도달하는 항로가 자주 이용되었다. 물론 그 시발점과 귀착지는 벽란도였다.
한편 요와 금은 고려에 은이나 모피·말 등을 가져와서 주로 그들에게 부족한 농기구나 식량 등으로 바꾸어 가는 교역형태였다. 거란과는 사신의 교환에 따라 수행되는 공무역 외에 국경 지대의 교역장인 각장에서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벽란도를 통한 교역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만은 않았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 역할이 무시할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 무렵 고려의 교역상대로 주목하여야 할 존재는 아라비아 상인들이다. 대식국(大食國)으로 불렸던 아라비아의 상인들은 송을 거치거나 직접 내왕하기도 하면서 고려에 수은·향료·산호 등을 가져왔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호인 ‘KOREA’는 이들을 통해 ‘고려’가 세계로 알려지면서 현재에 이른 것이다.
국제항인 벽란도와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는 최무선이 왜구를 격퇴하기 위하여 원으로부터 화약을 들여온 창구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최무선은 화약을 배우고 얻기 위하여 중국인의 왕래가 잦은 벽란도에서 염초(화약) 제조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다. 결국 최무선은 강남지방에서 온 이원(李元)을 만나게 되어 그로부터 화약 제조법을 배워 왜구 격퇴에 활용하였다.
고려와 세계의 소통이라는 점에서 벽란도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쇠퇴한 벽란도
그러나 활기에 찼던 벽란도의 모습은 몽골과의 항쟁으로 강화로 천도함으로써 크게 위축되었다. 한때 원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벽란도는 다시 그 면모를 찾기도 하지만, 조선시대에 육로 중심의 교통체제가 되면서 쇠퇴 일로를 걷는다. 조선 시대에는 개성에서 황해우도(黃海右道)로 통하는 대로상에 위치하였던 나루터로서 국내 교통의 요지 정도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우도수참전운판관(右道水站轉運判官)이 겸하는 도승(渡丞)이 한 명이 배치되었다.
한때는 고려 시대에 중요한 무역항이며 국제항이자 교통의 요지였던 벽란도의 기능은 사라졌다. 단지 주변의 경치를 찾는 풍류객의 발길만이 머무는 곳이 되고 말았다. 조선중기 문인이 남긴 시 한 수에서 그 애잔함을 느낄 뿐이다.
강 위로 각(角) 소리가 흐르니 / 江上嗚嗚聞角聲
북두칠성은 손자루를 맑은 강에 담군다 / 斗柄揷江江水明
때 이른 밀물이 강기슭을 덮치니 오리 떼가 어지럽다/ 早潮侵岸鴨鵝亂
보일 듯 말듯한 곳에 있는 집의 등이 켜지며 다듬이 소리가 들려온다 / 遙舍點燈砧杵鳴
나그네는 문을 나서고 그제야 달이 기운다 / 客子出門月初落
뱃사공이 자리를 깔며 바람 불길 바란다 / 舟人掛席風欲生
중국 천 리 길이 여기서부터 시작인데 / 西州千里自此去
먼 길에 따르는 험난함이 언제쯤 사라질까 / 長路險艱何日平 -石洲集-
조선 이후로 행정관할도 개성부(開城府)에 소속에서 경기도 개성군 서면, 경기도 개풍군 서면 등로 바뀌었다가 6·25 전쟁 이후에는 DMZ 북쪽에 위치하게 되어 가 볼 수 없는 지역이 되었다.
#벽란도의 현재적 의미와 서해안 시대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대외관계를 구사했던 고려는 바다를 통하여 위상을 높였다. 그 중심에 벽란도가 잇었다. 벽란도는 개경의 관문일 뿐 아니라 고려의 중추였다. 해외의 모든 것들이 벽란도를 거쳐 들어왔고 또 고려의 전부가 세계로 나갔다. 벽란도는 세계와 고려의 소통이었다.
이제 벽란도는 잠을 깨야 한다. 벽란도는 재조명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벽란도는 출입 통제 지역이다. 한때는 세계의 끝까지 연결되었 벽란도가 현재는 출입 불가능한 동항(凍港)이 되었다. 당시에 비교대상이 되지도 못하였던 인천이나 경기도의 여러 항구가 국제항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과 크게 비교되는 것이다.
미래를 해양의 시대라고도 한다. 경기도로서는 서해안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벽란도는 미래 세계의 주역으로 거듭 태어나 지난날의 명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세계인이 드나들며 끝없이 펼쳐진 해양을 통해 ‘KOREA’라는 이름을 연호하였던 그 시대의 부활을 꿈꾸며 벽란도를 상기(想起)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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