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⑧옛 그림 속 개경의 명승

   
▲ '송도기행첩' 중 일곱 번째 그림인 '영통동 입구'는 음영법을 시도한 그림으로 오관산(五冠山) 영통동으로 향하는 길목 풍경을 그린 것이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1세기 중엽에 활동한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 했다. 아름다운 풍광을 접하면 너나없이 감탄하며 감동을 오래 간직하고 기억하려 글과 그림을 남긴다. 프랑스 퐁텐블로 숲 북쪽 바르비종 마을과 인상주의, 중국의 5악과 일본의 후지산, 우리의 금강산 등 동서양 가릴 곳 없이 아름다운 풍광은 화면에 옮겨져 명화로 되살아난다. 동아시아 전통회화 중 인물과 화조에 앞서 첫손 꼽히는 영역은 다름 아닌 산수화이다.

서구의 풍경화보다 5세기 앞서 탄생했으며, 이상화된 경관을 담은 사의산수(寫意山水)와 구체적인 승경이나 명소를 사생을 통해 옮긴 실경산수(實景山水)로 양분된다. 사의산수 또한 실제 경관의 감동에서 비롯했으나 점차 일정한 틀을 형성해 정형산수(定型山水)로도 불리며 국경과 시대를 초월한 국제적인 양식을 이룬다. 실경산수를 강조하다보면 흔히 정형산수는 중국풍이나 그 아류 정도로 간주하기 쉽다. 이는 형식과 양식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잘못이다.



#송도의 명소를 담은 ‘송도기행첩’ - 16점의 그림과 3건의 문장으로 구성

5백년 가까운 고려왕조의 수도 송도는 한양에 버금가는 명당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송도를 다룬 그림은 한양에 비해 몹시 드물다.

적지 않게 그려졌을 터이나 화재와 충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점에서 이유를 찾게 된다. 다행히 우리 문화의 황금시대로 지칭되는 진경시대 18세기 산물인 걸작 ‘송도기행첩’이 현존해 한없이 고맙고 반가울 따름이다.

이 화첩은 송도와 이 지역의 북쪽의 오관산·천마산·성거산 주변을 그린 16점의 그림과 3건의 글로 구성되었다. 다른 그 무엇에 앞서 개성 주변의 일련의 명승지를 함께 일괄로 그린 현존하는 조선시대 유일한 서화첩인 점에서 시선을 모은다.

아울러 ‘이 첩은 세상 사람들이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라 이를 그린 표암 강세황(姜世晃·1713~1791) 자신이 밝히고 있듯 그 이전에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화풍이기에 거리에 따른 크기를 다르게 한 원근법과 농담의 차이와 면 처리에 의한 입체감을 구사한 음영법 등 서양화법을 수용한 점에서 주목된다.

1756년 봄 부인 유씨가 먼저 타계하자 슬픔을 달랠 겸 몇 개월에 걸쳐 명승지를 유람했고 그 이듬해인 1757년 개성 유수 오수채(吳遂采·1692~1759)의 제안으로 개성을 여행하고 남긴 ‘화첩’이다.

첩에 실린 순서대로 그림 각 폭을 살피면 첫 폭인 ‘송도전경’은 화면 상단 중앙에 위치한 송악산과 화면 하단의 남문루를 사이에 두고 전개된 송악의 시가지가 펼쳐진다. 기와집이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은 개성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송도기행첩' 중 12번째 그림인 '박연폭포'는 대흥산성의 북문인 성거관, 문루 등 주변의 경물 하나하나를 빠트리지 않고 화폭에 그대로 옮겼다. 거대한 암석이 층층이 쌓인 암벽을 구축하고 그 사이를 포말을 일으키며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쏟아져 내려오고 있다.

송도의 동북쪽에 위치한 오관산 내 영통동 입구에 위치한 ‘화담’, 영통사 가는 길에 있는 ‘백석담’, 화담에서 영통사 사이의 ‘백화담’, 송도 동북쪽 성거산성 내에 있는 군량미를 비축하는 승창과 군기고와 화약고가 있던 ‘대흥사’는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는 시점으로 묘사했고, 천마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인 성거산 방면에 있는 ‘청심담’, 영통동으로 향하는 길목인 ‘영통동구’, 대흥 산성의 남문과 문루와 그 너머 인달봉을 그린 ‘산성의 남초’, 대흥사 부근에 있는 임금행차 때 머무는 행궁인 ‘대승당’, 폭포 아래가 말구유와 닮은 성거산 대흥동에 위치한 ‘마담’, 마담과 가까운 곳으로 일행 4명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표암 자신까지 등장시킨 ‘태종대’,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있는 잘 알려진 ‘박연폭포’ 등 12점은 2폭이 한 그림을 이룬다. 이어 한 폭에 한 점씩 그린 태안승경 4점이 이어진다. 군량미 저장 창고인 ‘태안창’과 주변 ‘낙월봉’, 송도를 조망할 수 있는 ‘만경대’와 태안동문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석벽인 ‘태안석벽’ 등이다.

강세황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문인화가이자 평론가로 ‘조선의 그림신선(畵仙)’으로 지칭되는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의 스승이기도 하다. 32세 때 서울서 안산으로 이주해 61세 때 벼슬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까지 30년 가까이 머문 안산은 그의 학문과 예술의 배양토였다. 이곳에서 김홍도와의 사제의 연도 이루어진다. 높은 학문과 장수 집안으로 조부부터 표암 자신까지 3대에 걸쳐 70넘도록 관직에 있었으니 김정희가 쓴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 편액이 이를 알려준다.

표암은 61세에 관직에 나아가 71세에 기로사에 들어갔다. 부친 강현(姜 작은 끌 현 한자가 없음.



·1650-1733)은 표암을 64세에 낳았으며 표암은 15세에 결혼해 17세에 맏아들이, 55세 때 다섯째인 막내가 태어난다. 시서화에 두루 능한 3절로 서화에 대한 적지 아니한 품평을 남겼다. 그는 여행과 사생을 통한 전통적인 문인화와 서양화풍의 원용 등 청신한 감각에 산수·인물·초상·화조·화훼초충·사군자 등 다양한 화목에 두루 손을 댔다. 문인화가의 사표이자, 당대 최고의 감식안으로 그는 회화사적 의의가 지대한 18세기 예원의 총수였다.

그림 속에 화가 자신을 등장시킨 점, 수묵위주이되 담청과 담황의 맑은 색조의 원용, 투시도법에 의해 시선을 모으는 점, 과감하고 참신한 새로운 시도 등 벼슬 나가기 이전 40대 중반에 안산시절에 그린 이 서화첩은 표암 중년의 대표작이자 그의 진경산수에 있어 최고의 명품으로 꼽힌다.

   
▲ 정선 작가 '박생연' : 겸재가 송도, 즉 개성의 명물인 박연폭포를 그린 작품이다. 거대 암석의 절벽 아래로 물줄기가 곧장 내리꽂히고 있으며 폭포 좌우에 기암괴석이 배치돼 있어 폭포가 더욱 그윽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폭포 우측으로는 바위 봉우리가 솟구쳐 있고 곁으로는 대흥산성의 북문인 성거관 문루를 높이 그려놓았다. 그 곳으로 오르는 길을 거의 수직에 가깝도록 몇 번 구불거리게 표현해 대흥산성의 지리적 특징을 암시하고 있다.

땅을 쪼갤 듯 하늘에서 세차게 흘러내려오니

지척의 천둥소리는 속세 티끌을 시원하게 쓸어버리고

놀란 새들은 피해 어디로 나라가려나

붉은 해도 짙은 그늘 속에 가리어져 어둡기만 하네.

-오수채의 ‘박연’ 중에서




#박연폭포-그림에 담긴 송도의 명소

동아시아 전통회화는 일견 비슷해 보이나 화풍에서 닮은 점 외에 차이점 또한 적지 않음을 간과하기 쉽다. 실경산수의 전통은 오래고 길다. 조선왕조 18세기 ‘조선의 그림 성인(畵聖)’ 정선(鄭敾·1676~1759)이 이룩해 조선후기 화단을 크게 풍미한 전무후무한 고유색 짙은 독자적인 실경산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라 칭한다.

그의 위대성은 단지 그림의 주인공이 우리 복식의 인물이며 우리 산천을 등장시켜서만은 아니다.

중국회화에 있어 선묘 위주인 화북산수와 번짐이 특징인 강남산수의 두 양식의 절충조화 화가들의 오랜 화두요 숙제였다. 이 문제를 정선은 나름대로 한 화면 내 원경의 골산은 선묘로 근경의 토산은 묵법으로 묘사해 해결했다.

이 같은 그의 화풍은 조선후기 화단에서 강한 울림으로 유파를 형성했고 나아가 국경을 넘어 일본과 중국에 영향을 미쳤다.

정선은 금강산을 비롯해 특히 서울과 한강 등 주변의 명소를 그린 명품들이 두루 전해진다. 잘 알려진 대작으로 장중한 ‘인왕제색’을 비롯해 북악산 남쪽 기슭에서 서울 장안의 밤풍경을 내려다보고 그린 시적 정취가 짙은 ‘서울 장안의 안개 낀 달밤’과 같은 위치에서 그린 ‘서울 장안의 안개비’는 이슬비 내리는 봄날 낮 풍광으로 남산과 그 뒤 원경으로 관악산·우면산·청계산 연봉이 이어진다. 이들 그림은 ‘송도전경’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서경덕(徐敬德)·황진이(黃眞伊)와 함께 송도삼절로 지칭되는 박연폭포는 길이가 37m로, 암석이 층층 쌓여 천길 벼랑의 절벽을 이루고 떨어지는 천군만마가 달리는 듯 천둥바람인 양 폭포의 굉음과 흰 눈 같이 날리는 포말 등 장관을 보이니 이를 읊은 시문이 적지 않다. 박연은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로 꼽히며 북한에서 천연기념물 제388호로 지정했다. 정선에게 개성 부근을 담은 그림으론 박연폭포 3점이 현존할 뿐이다.

화면에 적힌 작품명은 박생연·박연폭·박연 등이다. 같은 폭포를 60대 후반 정선과 40대 중반에 강세황이 그린 ‘송도기행첩’ 내 그림을 함께 살필 때 인물의 등장 여부, 족자와 화첩인 그림의 크기는 물론 정자인 범사정의 묘사, 계절이 가을과 여름으로 각기 다르다.

화면 구성과 구도, 필치에서 적지 아니한 차이를 읽을 수 있다. 물줄기며 주변의 정경에 있어 정선의 그림이 부드러운 듯 얌전해 보이나 사실은 보다 과장됨을 엿볼 수 있다. 종이에 먹물만으로 나중에 그린 보다 추상화를 보이는 그림도 전한다.

천연기념물이나 절승과 같은 것 또한 문화재이니 아름다운 풍경은 시대를 달리하며 과거만이 아닌 오늘과 내일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칭제건원(稱帝建元)의 황제국가로 시작한 고려는 5백년 가까이 왕조를 견지했다. 불교를 주체적인 이념으로 해 이른 금속활자와 화려하고 섬세한 관료적 귀족국가의 세련된 미감과 높은 문화수준은 청자와 불화가 대변한다.

한편 성리학 위주의 치장과 장식을 배제한 검박하고 해말고 밝은 명징한 조선미감과는 구별된다. 조선시대 그림을 통해 고려를 헤아림에 고려시대 그림에서 송도를 살필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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