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⑨고려의 경기인/경기도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

   
▲ 용주사 : 본래 갈양사로 994년(고려 성종 13)에 명주박씨이면서 황려현(여주)에 본적을 둔 혜거국사가 머물렀던 곳이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학예팀장 

#성씨와 본관

우리는 모두 성씨와 본관을 가지고 있다. '성관(姓貫)'이라고 한다. 지금은 '00김씨' '00이씨'라 하여 본관을 앞에 성씨를 뒤에 쓰지만, 전통시대에는 "000(성명)은 00인(人) 또는 00현인(縣人)·00군인(郡人)-여기서 00은 지역명이다-"이라고 밝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때 '00'은 출생지 또는 거주지가 아니라, 출신지·출자지(出自地)로 이해되고 있다. 성씨는 혈연을, 본관은 지역을 중심으로 하나의 동류의식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성씨와 본관은 어떤 관계에서 만들어졌을까? 언제부터 시행되었을까? 당연한 궁금증이다. 특히 이들은 부계 중심의 친족관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로 이해되어왔다. 때문에 우리는 친족 범위에 모계를 비롯한 비부계(非父系, 처가 등)를 포함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성씨와 본관은 모두 자신이 소속된 집단과 그 밖의 집단을 구별한다. 본관보다 성씨가 먼저 형성되었음은 의심할 바 없다. 족적 유대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의식은 성씨제도가 사용되기 이전부터 유지되었다. 그런데 사회가 다양해지면서 혈연공동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해 또 다른 장치를 필요로 했다. 한편으로는 규모가 큰 성씨 집단에서 파(派)가 갈라져 나오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파조(派祖, 파의 시조)를 중심으로 관계망이 재형성되는 가문(家門)은 이런 점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아울러 고대사회가 신라의 골품제와 같이 혈연의식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면, 이후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지역의식이 생겨났고,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씨제도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관은 혈연의식과 결합하여 대체로 시조, 또는 최소한 시조가 아니더라도 뛰어난 조상이 장기간에 걸쳐 거주했던 공간(지역)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려사회의 친속(親屬)은 부계(父系)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전적으로 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양측적(兩側的) 친속관계였다. 부계와 함께 상대되는 모계, 또는 비부계(非父系)의 혈연집단이 친척의 범위를 이루었다. 고려 초기 왕실의 경우에는 족내혼이 이루어지면서 휘칭성(諱稱姓, 姓을 정하는 방법)과 향리(鄕里, 고향)의 결정에서 부계를 따르지 않고 외가(外家, 외조부)를 따르도록 하였다. 이 경우에서도 외할아버지가 왕실 출신이면 할머니의 성씨를 따르고, 할머니도 왕실 출신인 경우 그 다음에 가까운 조상 중에 왕실 출신이 아닌 친족의 성씨를 따르게 하였다. 왕실 출신이더라도 외가의 향리를 본관으로 삼게 하였던 것이다. 또 13세기 중반 무인집권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임연(林衍)은 그의 아버지가 진주(鎭州)로 이사하여 그곳 향리(鄕吏)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모계의 향리(鄕里)인 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는 비부계까지를 포함하는 비교적 넓은 범위의 친족 관계가 운영되고 있었다. '고려사'에서 부계와 모계가 섞여 있는 고려왕실의 계보를 싣고 있거나, '제왕운기'에서 확인되는 비부계 계통의 고조건 건국신화는 이와 같은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본관제(本貫制)와 호적

가장 오랜 본관은 가진 성씨로는 개성 인근의 장단한씨(長湍韓氏)로 알려져 있다. 목종이 1001년(목종 4)에 인근 지방을 순회하다가 장단이 당시 문하시중(현재 국무총리)이었던 한언공(韓彦恭, 940∼1004)의 본관인 까닭에 단주(湍州)로 승격시킨다고 밝히고 있음이 '고려사'에 실려 있다. 10세기 말 이전에는 법제적으로 본관제도가 실시되었음을 뜻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현재 사용하고 있듯이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면적인 시행은 아니었다.

본관이라는 것은 해당 지역에 호적이 작성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현재의 의미와 사뭇 다르다. 890년(신라 진성여왕 4)에 건립된 원랑대사(圓郞大師)의 비문에는 그를 취성군 사람(取城郡人, 황해도 황주)으로 밝히고 있어 본관제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수원부 화산(花山)의 갈양사(葛陽寺)에서 994년(성종 13)에 건립된 혜거국사(惠居國師, 899~974)의 비문에는 그가 명주박씨(溟州朴氏)이면서도 천녕군 황려현인(黃驪縣人, 현재 여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주박씨였던 그의 호적이 황려현에 등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수원최씨의 경우도 그 선조들이 원래 신라의 경주에서 강원도 낭천군(狼川郡, 화천)으로, 다시 수주(수원)로 옮겨 수주인(水州人)이 되었다. 경주최씨의 일부가 어느 때에 낭천으로 옮겨가 낭천최씨가 되었다가 그 후손이 다시 수주로 적(籍)을 옮김에 따라 수주최씨가 되었다. 기록에는 최사위(崔士威, 961∼1041)의 6대조 때라고 하니 이미 9세기 말에 수원으로 옮겨와 적(籍)을 붙였음을 알 수 있다. 이자연(李子淵, 1003∼1061)의 본관인 인주(인천)이씨는 선대가 신라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씨 성을 하사받고 자손들이 소성현(邵城縣)에 옮겨 살게 되면서 그곳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들도 황해도 신천을 거쳐 인주로 간 것으로 확인된다. 박씨의 경우에는 북경도위(北京都尉)를 지낸 박적오(朴赤烏)가 신라에서 죽주(竹州, 안성)로 들어와 찰산후(察山候)가 되어 그 후손 일부가 죽산박씨가 되었고, 또 일부는 황해도 평주(平州, 평산)로 옮겨가 평산박씨가 되었다. 또 성씨를 왕실에서 하사받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의 건국공신으로 자신의 딸 둘을 태조 왕건의 15, 16째 부인인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과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으로, 또 다른 딸을 혜종의 제2비(妃)인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으로 바친 왕규(王規)-그는 왕건의 장인이자 왕건의 아들인 혜종의 장인이었다-는 광주(廣州)의 유력 호족이었는데, 그는 본래 광주의 속현인 양근현 출신의 함규(咸規)였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할 점이 있다. 후삼국을 중심으로 하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정치사회적인 상황이다. 신라 말 각 지역의 호족들은 중앙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 독립 세력들이었다. 후백제의 견훤, 후고구려의 궁예를 비롯하여 고려의 왕건 등은 모두 각 지방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세력을 키웠다. 신라의 국가권력이 지방까지 전혀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의식을 가지려 했다. 이점에서 혈연의식과 지역의식은 한 집단을 결속시키는 중요한 매개였다. 이 시기의 자료에서 확인되는 '주리호가(州里豪家)' '향려관족(鄕閭冠族)' '여리동량(閭里棟梁)' '장자(長者)' 등으로 불렸던 세력들이 그들이다. 대략 '고을에서 세력이 있는 집안', '마을의 본보기 또는 기둥, 어른'으로 해석된다. 그들은 이런 역할을 자칭했으며, 태조 왕건의 조상이 개경의 평나산(平那山) 산신인 평나산대왕이 되었듯이 혈연의 조상을 자신들이 관계하고 있던 각 지역의 산신이나 성황신으로 신격화시키면서 그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제41호, 962년) : 고려 초 호족의 존재 양상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주리호가(州里豪家)’, ‘향려관족(鄕閭冠族)’ 등 호족을 지칭하는 내용들이 새겨져 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중앙정부와 지방 호족간의 역할은 당연히 조정되어야 했다. 어느 때이건 왕조국가에서 중앙정부가 지방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다. 중앙정부는 각 지역에서 상납되는 조세와 역역(役役)의 징발을 토대로 운영되었고, 주·부·군·현(州府郡縣)의 지방 역시 그 아래의 행정망에 소속된 수입원이 없으면 기능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세의 근원을 확보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호적(戶籍)의 작성이자 관리였다. 호적을 작성한다는 의미는 중앙에서 수령이 파견되는 주현(主縣)은 아니어도 거기에 소속된 속현(屬縣) 등을 통한 적극적인 지방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고, 양전(量田)을 통한 토지대장의 작성 등 사회경제적인 여건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본관제의 본격적인 실시란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치력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고, 호족 세력이 고려정부에 흡수되어 향리층(鄕吏層)으로 변화하는 10세기 후반이라야 가능했다. 즉 본관제의 전면적인 시행은 9세기부터 그 조건들이 하나 둘 마련되어 고려 성종 때 적극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범위는 귀족관료, 승려 등을 대상으로 했던 초기보다 점차 확대되어 고려 후기에는 일반 양인(백성)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들은 국가의 중요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각 지역의 호장(戶長) 등을 맟았던 향리(鄕吏) 계층은 해당지역의 유력 성씨를 지칭하는 토성(土姓)으로 등장하였다.

 

#경기도를 본관으로 하는 토성(土姓)

조선시대에 각 지역(현재 시·군 단위)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인문지리 정보를 풍부하게 담고 있는 '세종실록지리지'(15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16세기), '여지도서'(18세기) 등에서는 성씨(姓氏)에 관한 항목을 빠뜨리지 않고 있다. 이후 편찬된 '경기지(京畿誌)'를 비롯한 경기도 관련 지리지와 경기도에 속해있던 각 군현의 지리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각 군현 단위로 파악되고 있던 성씨들은 시기별로 들고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것은 향촌사회 지배질서의 변화와 긴밀하게 연동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바탕으로 살펴보면, 15세기 중엽에 경기도 소재의 성씨들은 422개였다. 이들 중에서 조사 당시 이미 지역사회의 향리층에서 탈락한 성씨-망성(亡姓)이라고 한다-가 159개이고, 다른 지역과의 관계에서 들고난 기타 성씨가 57개인데 비해 토성은 206개로 압도적이다. 이들 토성은 각 군현을 본관으로 삼아 지방사회를 이끌어갔는데, 1308년 11월 충선왕이 복위하면서 고려의 명문가로 지정한 전국 15개 토성에는 경원이씨, 안산김씨, 철원최씨, 공암허씨, 당성(남양)홍씨, 황려(여흥)민씨, 파평윤씨 등 경기도의 7개 성씨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 15세기 후반 저술된 '용재총화'에서 성현(成俔, 1439∼1504)은 '우리나라의 명문집안(我國巨族)'중에 경기도의 성씨로 파평윤씨, 한양조씨, 이천서씨, 여흥민씨, 수원최씨, 양천허씨, 덕수이씨, 행주기씨, 교하노씨, 인천이씨, 인천채씨, 남양홍씨, 용구이씨, 죽산박씨, 죽산안씨, 양성이씨, 광주이씨, 강화봉씨 등을 들고 있다. 이들은 15세기 이후 206개 경기도의 토성을 대표하는 성씨이자 조선의 명문가로 자리를 잡았다.

 

#성씨와 본관의 현재적 의미

사람들은 첫 만남에서(특히 연하인 경우) 일단 어색함을 피할 목적으로 의례적인 몇 가지 질문을 하곤 한다. 상대방의 기분, 입장과 별 관계가 없다. 그중에 '본(관)이 어디인지' '언제부터 현재의 거처에서 살고 있는지' 등은 무의식적인 발언 가운데 꼭 들어가는 것들이다(이런 류의 사람들은 진부하다고 치부되기도 한다). 오랜 기억이지만, 한 지인의 출판기념회에 갔다가 당시 내 나이의 2배에 가까운 노정객(老政客)에게서 단답형이면서도 독백과 같은 이런 질문을 들었던 경험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때인가 내가 닮아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내 삶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자위한다(지금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이번 기획의 두 번째 세션에서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경기도 각 지역 토성의 대표 인물이 소개되어 있는 8개 성씨인 이천서씨, 금천강씨, 파평윤씨, 경원이씨, 수주최씨, 여흥이씨, 남양홍씨, 공암허씨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지금은 조금 생소한 호적과 본관을 뒤적이며 경기도의 성씨를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이 가졌던 사회적 관계망은 지역공동체의 뿌리를 통해 향후의 진전 방향을 겨누어보는 것과 맞닿아 있다. 경기도의 어느 한 곳을 본관으로 갖고 있지 않은 필자가 현재적 의미에서 경기인(京畿人)·경기민(京畿民)이듯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그런 경기인들이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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