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연의 풍수기행] 양평 이항로 선생 생가… 산골 속의 '보국'
[정경연의 풍수기행] 양평 이항로 선생 생가… 산골 속의 '보국'
  • 정경연
  • 기사입력 2017.08.23 22:50
  • 최종수정 2017.08.2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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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가 있는 곳은 산속의 분지, 화서의 보수적 성향 반영한 듯
용문·중미산 등 웅장한 산줄기… 민족주체성 지키려는 뜻 담긴 듯
조선말기 성리학자인 화서(華西) 이항로(1792~1868)의 생가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화서1로 239(노문리 535-6)에 소재한다. 마을 이름이 벽계(蘗溪)인데 벽진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벽진이씨는 경북 성주군 벽진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다. 시조는 신라 말에 벽진태수로 있던 이총언으로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벽진장군에 봉해졌다. 이항로는 이총언의 27세손이다. 그의 고조부인 이정철(1628~1705)이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는데, 그전에 살았던 파주를 떠나 이곳으로 오면서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이항로의 아버지 이회장은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으나 덕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는 집을 청화정사(靑華精舍)라 칭하고 덕망 있는 선비들을 초대하여 담론하는 것을 즐겼다. 그때마다 어린 화서를 곁에 두어 이를 배우도록 하였다. 화서는 17세 되던 해 성균관에 반시 보러 갔다가 부정이 있는 것을 보고 그냥 돌아왔다. 18세에 한성시 초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당시 권력자가 자신의 아들과 가까이 지낼 것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집에 돌아왔다. 그 후 과거장의 출입 자체가 부끄럽다며 더 이상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화서의 학문세계는 주리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만사는 리(理)뿐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살았던 정조 16년부터 고종 5년까지는 격변의 시기였다. 개화세력과 수구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도학적 의리를 강조하며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내세웠다. 위정이란 바른 것 즉,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자는 것이고, 척사란 사악한 것 즉, 성리학 외의 사상은 배척하자는 것이다. 이는 우암 송시열의 사상과 일치한다. 송시열은 “세상의 모든 이치는 주자가 바르게 해석 해놓았으니 이를 벗어나는 것은 모두 사문난적이다”고 하여 성리학 외의 것은 배척하였다.

화서의 사상은 조선말기 위정척사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그의 제자들을 ‘화서학파’라고도 부르는데 한말 외세에 대항하여 싸운 의병장이 많다. 위정척사 운동의 중심인물 최익현, 의병대장 유인석, 춘천지방 의병장 유홍석, 외세배척을 주장하다 처형당한 홍재학, 강화 삼랑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시킨 양헌수 등이 모두 화서의 제자다. 화서를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성리학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던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다. 풍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출신지를 보면 산간지방이 많다. 반대로 개방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강변이나 평야지대 출신들이 많다. 성장기에 외부 문물을 얼마나 많이 접하느냐에 따라 성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화서의 생가가 있는 벽계마을은 ‘산길 50리, 물길 80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산 높고 물 깊은 곳이다.

이곳의 태조산은 용문산(1157m)이며, 수많은 봉우리를 만들면서 산맥이 내려와 곡달산(630m)을 일으켰다. 그리고 화야산(754.2m)으로 가는 도중 남서쪽으로 산줄기 하나를 뻗었다. 여기서 다시 분지한 산줄기가 사기막천을 만나 멈춘 곳에 생가가 위치한다. 앞의 산들은 용문산에서부터 유명산(864m)·중미산(834m)·가마봉(467m)·매곡산(509.5m)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산이 높고 그 세가 웅장하다. 산고곡심(山高谷深) 즉,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곳에서는 혈을 찾지 말라고 하였다. 좋은 터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곳은 작은 보국이 형성되어 하늘이 둥그렇게 보인다. 이렇게 깊은 골짜기에서도 양명한 땅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고택 뒤에서 산에서 내려오는 용을 살펴보면, 큰 변화가 없다. 대혈은 아니라는 의미다. 만약 용이 좋았더라면 화서는 조정에서 크게 활동했을지도 모른다. 집 앞 정면으로는 동그랗게 생긴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있다. 부를 상징하는 노적봉이다. 화서 일가가 학문에만 전념해도 될 만큼의 경제력이 있었던 것은 안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화서는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즐기며 주자의 무이구곡과 송시열의 화양구곡을 본떠 벽계구곡을 노래했다.

화서의 묘는 생가 뒤 산중턱에 있는데 앞이 급격한 경사를 이루는 비혈지다. 묘소 아래에는 사당인 노산사(盧山祠)가 있다. 그의 도학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사림들이 세웠다. 화서는 생전에 주자와 우암의 영정을 모시고 항상 경모했다. 그 뜻을 받들어 주자를 주벽으로 하고 동쪽에 우암, 서쪽에 화서의 위패를 모셨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로서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화서의 삶은 이곳 산세와 무관하지 않았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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