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1924~2015) 화백하면 ‘미인도’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또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꽃의 화가’라고 이야기해도 될 만큼 천경자 화백은 많은 꽃그림을 그렸다. 그는 1969년이래로 여러 차례 세계여행을 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그곳의 꽃들을 열심히 관찰했다. 멕시코, 타이티, 괌, 아프리카의 이국적 풍경 속에서 오롯이 피어난 야생화들뿐만 아니라 그곳 여인들의 바구니와 옷과 모자에 장식된 꽃들은 천경자의 눈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소재였다. 그는 꽃을 통해 그곳 풍토의 특성과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찬미를 표현해내곤 했던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채색화가에게 꽃은 색의 탐닉을 발산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였다. 그렇기에 천 화백은 한 가지 색 꽃그림보다는 여러 색이 어우러진 꽃그림을 그렸다.

▲ 천경자, <팬지> 1973, 종이 위에 채색, 33 x 29cm


알려진 바와 같이 신산하기 그지없었던 그의 인생살이를 부정이라도 하려는 듯 천경자는 꽃을 화려하고 풍성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그렸다. 1974년작 ‘고(孤)’, 1977년작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같은 그림들이 그것을 반증한다. ‘고’의 여인은 장미, 패랭이, 팬지꽃들로 어우러진 화관(花冠)을 쓰고 있다. 여인의 흑단 같이 검은 머리카락은 화려한 화관과 대조를 이루며 고독감과 찬란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에 등장하는 여인은 뱀 네 마리가 꿈틀거리는 기괴한 관을 쓰고 있는 한편 분홍색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있어 당당하다. 광대뼈가 솟은 길쭉한 얼굴, 깊은 눈매, 길게 뻗은 코, 또렷한 입술선에서 천경자 자신의 자화상임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는 이 여인들이 특별한 까닭은 너무도 외롭고 슬플 때조차 희망과 환희, 열정을 품고 있는 천경자의 마음가짐을 그대로 표현해 낸 그림이기 때문이다. 화관의 꽃들과 한 송이 장미꽃은 그런 화가의 마음을 상징한다.



1973년작 ‘팬지’는 전설적인 헐리웃 여배우 마릴린 먼로와 팬지꽃을 그린 작품이다.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보라색, 파란색, 자주색의 팬지가 투병한 유리컵에 넘쳐날 듯 꽂혀 있고 유리컵 속에는 마릴린 먼로의 모습이 관능적인 미소를 지으며 투영되어 있다. 천경자는 1924년 생, 마릴린 먼로는 1926년생. 천경자는 거의 동년배인 마릴린 먼로를 소재로 겉보기는 화려하나 그 이면에 누구와도 견주기 어려운 인생의 고통과 절망에 괴로워하고 평생을 고독해 했던 여배우의 삶과 자신의 삶을 이 그림을 통해 동일시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앙증맞으면서도 여린 매무새,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색을 다 지닌 듯 어여쁜 팬지는 마릴린 먼로와 천경자의 인생을 비유하고 있다.

최은주 경기도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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