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용사형 어미 ‘-ic, -tic’이 있다. 일본은 ?틱(-tic)을 ‘티키·치키’로 발음한다. 한자 的(적)의 발음은 ‘테키’이다. 접미사 -적(的)은 일본이 1800년대 후반 -tic을 가차한 말이다. 데모크래틱은 ‘민주적’, 에로틱은 ‘성애적’으로 번역하였다. 로맨틱(romantic)은 한자 ‘浪漫的’(낭만적)으로 번역하고 ‘로-만테키’로 읽는다.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말이다. 문장마다 빠지지 않는 접미사 ‘적’을 일본이 만들었다니 당황스럽겠다. 난감하기는, 기미독립선언서에 ‘적’이 열일곱 번, 그 중 ‘민족적’도 여섯 번이나 보인다는 사실이다. ‘민족’도 일본제이다.

서양문물 도입하며 일본은 많은 번역어를 만들었다. 새로운 사상과 문화 도입에서는 개념 정립이 중요하다. 일본은 용어들을 가나 아닌 한자로 번역하였다. ‘관념, 이상, 철학, 역설, 본능, 개념’ 같은 개념, ‘과학, 기술, 물질, 정치, 해방, 인권, 민족’도 일본제이다. 동양고전의 낱말에 새로운 의미 덧댄 것도 문화, 자유, 계급, 경제, 권리, 정치, 사회, 사상, 자연 등 숱하다. ‘-적’처럼 쓰는 접미사 -력, -성, -식, -형 -화나 -사회, -작용, -주의 같은 말도 수두룩하다.

이 일본제 한자말 빼면 우리말 구사가 퍽 어렵다. 그렇지만 일본이 서양문화를 자기 것으로 소화한 노고에는 숙연해진다. 지금 사람들이 한자 뜻 좇아 의미 쉬 짐작하지만, 그렇게 이해시키려 한 번역자의 통찰과 숙려는 참으로 값지다. 그런데, 필자는 이 일본제 한자어 놓고 혼란스럽다. 아직도 친일파, 토착왜구 따지는 때라 마음이 불편하다. 이 말들은 일본말인가 우리말인가? 가이당, 곤조, 쇼부, 도꼬다이로 발음하면 일본말이고, 같은 한자를 계단, 근성, 승부, 특공대로 읽으면 우리말인가? 어디까지가 친일인가.

‘일제 잔재 청산 마당’이란 행사가 있어 웃었다. ‘잔재’와 ‘청산’이 일본제니까, 일제 한자어도 우리말로만 발음하면 괜찮다는 말인가. 그러나 몰라서 썼을 수도 있으니 명쾌하지 않다. 해방 후 76년간 왜색 찌꺼기(잔재) 씻어냈는데(청산) 아직도 남은 게 있을까? 이승만과 박정희는 국민의 반일감정 건드려 정치적 이득을 챙겼다. 그런데 반일 정서는 지금도 더러 정략적으로 악용되는 것만 같다. 필자는 일본제 한자어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할 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을 일본어라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생각하면 과거 삼국시대 이래 천년 세월동안 한반도로부터 수많은 말들이 일본에 전해졌다. 이에 대한 연구 성과는 많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계통적으로 많이 유사함은, 이처럼 역사적으로 양국의 말이 오랫동안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접국 언어 간의 상호작용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제국주의 정신 담긴 ‘국민학교’ 같은 몇몇 역사적 민족적 문제로 볼 말만 아니라면, 이제 일제 낱말에 대한 거부감 걷을 때 되지 않았을까.

80년대 무역학 전공한 필자의 논문 주제는 대일무역 적자였다. 원재료 수출하고 공산품 수입하는 구조 타파는 불가능해 보였다. 90년대 일본 가면 쇼핑할 것 천지였다. 그러나 어느새 세상이 바뀌었다. 한국인의 삶이 일본에 앞설 날도 머지않았다. 필자는 도쿄올림픽에서 일본의 행사 준비와 우리 선수들의 여유 비교하며 퍽 즐거웠다. 정신과 의식, 문화와 예술도 일본은 더 이상 경계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피해의식 털어내자. 정치꾼들 정략적 발언 친일파, 왜구, 부역 같은 말 이제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 

유호명 경동대학교 대외협력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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