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백남준을 사랑하는 일

2020-08-06     김성은

"앞으로 우리 모두는 아마추어 텔레비전 방송을 하게 될 것이다." (백남준, 1967년)

"텔레비전 화면을 1001가지 방법으로 다양하게 즉각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고안했다." (백남준, 1970년)

예전 아마추어 라디오 무선사들처럼 미래에는 각자가 저마다의 텔레비전 방송을 하게 되리라 백남준은 전망했다. 또한 방송 화면을 누구나 바로바로 쉽게 편집하고 합성할 수 있는 비디오 신시사이저를 개발했고, 이 기계가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천일야화’의 ‘1001’이라는 숫자를 사용했다. 백남준이 내다본 그 미래를 2020년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다. 아마추어 문화와 즉각성을 특징으로 하는 소셜 미디어, 유튜브 크리에이터의 시대이다.

백남준의 신시사이저는 1970년 보스턴의 한 방송국에서 방영했던 백남준의 생방송 작품 ‘비디오 코뮨’에 실제로 투입됐는데, 이 작업의 주된 소재는 영국 록 밴드 비틀즈의 곡들이었다. 특이한 컷과 앵글로 이루어진 ‘시각적 음악’으로서 뮤직비디오, 텔레비전 방송의 힘을 통해 탄생하는 ‘셀럽’ 연예인 등 매체의 특성으로 탄생한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비틀즈에 백남준은 주목했던 것이다.

대중문화의 요소는 위성으로 여러 도시를 연결하고 예술가들과 팝 가수들이 생방송으로 한데 어우러지도록 한 백남준의 일명 ‘위성 오페라’ 시리즈에서 두드러진다. 예컨대, 백남준의 1988년작 ‘세계와 손잡고’에는 영국 글램 록의 대부 데이비드 보위가 출연해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를 부르며 현대무용그룹 라라라 휴먼 스텝스와 춤을 췄다. 백남준은 여기에 실시간으로 합성한 비디오 영상을 결합하여 방송되도록 했다.

비틀즈와 마찬가지로 보위 역시 시각 문화와 음악의 관계, 미디어의 이미지 소비, 대중 가수의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세계를 하나로 묶는 음악적 ‘그루브’가 필요하다던 백남준의 주장은 그의 위성 프로젝트를 넘어 요즘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한국 아이돌 밴드의 모습에서도 새삼스럽게 귓전을 울린다. 백남준은 보위를 소재로 몇 가지 회화 작품도 만들었는데, 백남준아트센터 소장작은 보위의 스틸 컷에 픽셀 색상표가 결합해 디지털 이미지처럼 보이도록 돼 있다.

이 같은 내용이 올해 3월 새롭게 단장하는 백남준아트센터의 상설전시에 담긴다. 최근 런던 테이트 미술관의 백남준 전시가 국내에서 많이 회자됐다. 세계적 미술관에서 미술사적으로 백남준을 조명하는 대형 회고전이 열렸다는 점은 분명 큰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그에 못지않게 백남준이 우리 곁에 계속 생동하도록 그의 예술 세계로부터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들을 이어가려는 꾸준하고 일상적인 노력도 중요하다. 백남준아트센터의 사명은 여기에 있다.

새 전시의 시작에 맞춰 백남준아트센터 소장품 선집도 출간된다. 수년간 중단되었던 소장품 구입이 문제의식을 공유한 경기도의 지원으로 2018년부터 재개되면서 미술관의 근본적 활동인 소장품 수집이 비로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출간될 선집은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백남준아트센터의 소장품으로부터 전문가와 대중들이 고루 관심을 가질 만한 문화적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 초석이 되고자 한다.

백남준을 사랑하는 일이 크고 멋진 이벤트로 명성을 드높이는 것만은 아닐 테다. 백남준이 말한 대로 예술은 일등을 매기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래할 미래를 사유하고 감지했던 백남준의 통찰을 그의 따뜻한 유머 속에서 재발견하는 희열. 백남준을 사랑하는 일은 그렇게 시작될 수 있다.

"‘비전과 텔레비전’ 전시가 열린 미술관 바깥에 강아지들이 몰려들었어요. 백여 대의 TV 수상기가 뿜어내는 주파수가 사람들에게는 잘 안 들리지만 개들에게는 마치 비틀즈의 공연과 무하마드 알리의 권투 시합을 합한 것처럼 흥미롭게 들렸던 것입니다. 개들을 위한 케이블 TV 채널이 생겨야 해요. 그러면 맨해튼의 작은 아파트에 사느라 신경질 나 있는 개들을 진정시켜 줄 것입니다. 나는 강아지를 위한 ‘초음파 자장가’를 작곡할 것이고요. 고양이 사료 광고만큼이나 강아지용 비디오테이프 광고를 자주 보게 될 겁니다." (백남준, 1972년)

김성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