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사소한 동기-나의 세계여행
전업 화가란 늘 작업실에 갇혀 그림을 경작하는 미술 노동자이다. 가끔 작업의 성과가 뚜렷하지 않고 지칠 때 감정기복이 사납고 외롭다. 깊은 작업 과정을 떠나면 사색이 필요하다. 생각이 깊으면 더욱 고적하지만 가끔 먼 상상력을 당겨오거나 상처받은 꿈들을 응시한다.
20년 전 어느 날 나는 TV에서 다큐멘터리 한편을 보게 되었다. 시안, 둔황, 트루판, 카슈가르,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바람이 일렁이는 NHK제작의 실크로드였다. 터프한 지프 한대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광활한 대지 위를 질주했다. "길이라도 좋다 아니라도 좋다." 라는 방랑의 캠프를 연상케 하는 황량한 풍경에 아름다운 전자 음악에 실려 마치 종이위에 스며드는 수채화물감처럼 번졌다. 나는 문득 세계 여행을 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수만리 천축을 고행한 신라 승 혜초와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의 발자취도 따라가 보고 싶었다.
이 나이에 무슨, 이라고 접다가 인도 여행부터 나섰다. 그러나 부족한 준비와 예상하지 못한 환경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아수라장인 뭄바이와 델리의 빈민가는 끔찍했고 시신을 태워 갠지스강가로 흘려보내는 바라나시의 풍경은 더욱 암울했다. 역겨운 마살라 내음이 진동하는 식당, 구걸에 능숙한 거지들은 틈만 나면 불쑥 손을 내밀어 심신은 점점 지쳤다. 한 달 동안의 인도 여행은 고달픔과 혼란과 나 사이의 충돌로 깊은 간격만 벌려놓았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그토록 힘겨웠던 인도가 다시 그리웠다. 돌아서면 그리운 곳 이라는 수식어가 틀리지 않았다. 빈민가 아이들의 간절한 눈동자, 불결한 화장실, 손가락으로 커리 정식을 먹어야 했던 조악한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숨 쉬기 조차 힘들었던 찜통 만원열차의 짜이와 난, 마살라 냄새도 그리웠다.
그 후 나는 파키스탄, 네팔, 티베트는 물론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실크로드를 여행했다. 둔황 막고굴에서 혜초의 방을 마주할 수 있었으며 고선지가 이끌었던 파미르고원 너머 길기트도 가보았다. 나의 세계 여행은 다큐멘터리 실크로드의 아름다운 전자음악이 발단이었듯 엄청난 계획이 아니라 즉흥적인 상상의 이동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나는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의 오지를 여행했으며 시리아, 과테말라, 쿠바 여행은 가장 인상적이었다. 나는 늘 순간적 충동을 현실에 접합했고 그것은 항상 뜻대로 종결 되었다. 어느 날 후배 화가들과 만든 봉사회 회원들과 밤 깊게 정담을 나누다가 동해의 일출을 보고 싶었는데 마침 후배가 승합차를 내와 우리는 단숨에 경포대로 갔고 일출까지 보게 되었다. 우리는 그때의 추억을 아직 잊지 못한다. 거창한 계획은 엇갈린 시간에 접히기 쉽지만 즉흥적 행위는 활어처럼 늘 곁에서 파닥인다.
또 하나의 동기가 있다. 어느 날 전위예술가 홍신자 선생의 ‘무엇이던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읽고 나서다. 무엇보다 홍 선생이 석가가 우주의 중심이라 지목했던 상상의 산 수미산 아래에서 화장실을 찾다가 구덩이에 앉아 자연배설을 하는 구절은 감동적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저 우주 속으로 사라진다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곳에 존재하는 건 하늘을 가득채운 별빛과 태초의 세상이 그러했을 적막뿐이었다.’ 라는 대목을 따라 나는 수미산으로 갔다. 그리고 수많은 별들의 영접아래 원초적 자연인을 경험했다. 영롱한 별 밭은 내 영혼의 고향임을 자각한 젊은 날의 자유가 그립다.
이해균 해움미술관 대표,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