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민원과 청탁

2020-09-17     유현덕

굳이 김치찌개를 청탁까지 해가며 먹어야하는지를 이야기하게 되는 이 시절이 하수선하여 답답하기 짝이 없다. 민원실에 연락하면 민원이고 청탁이 아니란다. 그럼, 청탁은 청탁실에 해야만 청탁인 것인가. 부드럽게 문의만 했지 압력은 없었다고 한다. 청탁이나 압력은 말 하는 사람의 입장보다 듣는 사람의 상태가 우선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제조건은 전화를 한 당사자의 사회적 지위나 이름을 밝히는 순간부터 압력이 시작 된다는 것이다. 김치찌개 이야기를 더 해보면 낯선 손님이 물어보는 본인이 주문한 김치찌개가 언제 나오느냐와 단골손님이 물어오는 내 찌개는 언제 나오느냐가 주인의 입장에서 똑같은 크기로 들릴 리가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 땅 대한민국에서 자식 일에 자유스럽고 무덤덤할 부모가 몇이나 될까... 그렇게 가슴 아프고 애달픈 부모의 마음을 손가락질 할 사람들도 많지 않을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본인의 목숨도 초개와 같이 던질 수 있는 것이 부모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민원이냐 청탁이냐, 압력이냐 읍소냐는 본질이 아닐 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로서는 충분히 이해와 아량을 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렇게 했을까 하는 충분한 공감도 가지고 있으며 적어도 남의 자식 일에 대해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무언의 약속이며 분위기이기도 한 때문이다. 누군가 내 자식에 대해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관심의 소재로 삼았을 때 아무렇지 않을 부모는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당연히 신경이 쓰일 것이며 혹여 오해나 지탄을 받을까 전전긍긍 할 수밖에 없다. 최근 그런 부모중 하나가 화제의 중심에 서있다. 그 부모가 차라리 식당주인이거나 편의점 점주거나 평범한 회사원이거나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탑승자와 같은 칸에 있을까봐 노심초사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민초였다면 이리 시끄러운 소리가 났을까 싶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소수정당이든 명색이 정당대표의 측근이든 보좌관이든 하다못해 그 집 가정부라 해도 입조심, 행동조심, 눈빛조심을 해야 하거늘 그렇지 못한 것을 탓해야 함에도 내가 안했다, 해 달라 한 적 없다 라 는 것이 사람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서 일찌감치 벗어나 솔직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부모의 심정으로 욕심을 부리고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쉽게 이해와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것이다. 더 가관인 것은 그를 둘러싼 주위사람들의 행태들이다. 무조건적인 내 편들기가 과연 언제까지 먹혀들 것이라는 그 자신감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대체 알 수가 없다.

아무리 내 자식, 내 부모라 해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그것이 내 사회적 경제적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불공정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끝까지 다툰 부분이 그것이다. 싸가지 없고 차가운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때로는 갈등에 휩싸여도 나름의 원칙을 지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적인 화가가 있다. 그 화가가 나이가 먹어 스스로가 정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때에 본인의 변으로 벽에 그린 그림을 찬사와 더불어 경이로운 작품이라 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무리 그 화가가 위대하고 존경받았던 명사라 해도 똥칠은 똥칠일 뿐이다. 그것이 작품일리는 절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 두려운 까닭을 모르겠다. 자기부정이라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인가. 솔직한 사과와 인정이 발 뻗고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기회임을 왜 모르고 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계속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유현덕 한국캘리그래피 협회장